김종원 영화평론가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이후 육식을 피해왔는데 여기에는 4·3 당시 무장대의 잘린 목을 본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록에 썼다. 강성만 선임기자
최근 600쪽이 넘는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한상언영화연구소)을 낸 김종원(8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임고문은 한국 영화평론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1959년 ‘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월간지 ‘자유공론’ 게재)라는 글로 영화평론을 시작한 그는 한국 영화평론의 황금기인 1980~90년대에 신문 등 각종 매체의 영화평론 청탁 1순위로 꼽혔다. 당시 영화를 소개하는 방송 출연도 활발히 해 얼굴이 알려지면서 음향기기 광고모델까지 했다. 1990년대 이후로는 한국영화사 연구에도 관심을 갖고 공저로 ‘우리영화 100년’(공저, 현암사)을 냈고 초기 한국영화 걸작 ‘아리랑’(1926) 연출자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일본인 스모리 슈이치가 아니라 나운규임을 밝히는 논문도 썼다. 그와 고 이영일 평론가 등 6명이 1960년에 만든 영화평론가협회는 창립 63년인 올해 회원 92명으로 성장했다.
그는 영화평론가로 데뷔하던 해 ‘사상계’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자, 자유언론운동을 펼치다 1975년 조선일보사에서 쫓겨난 해직기자이기도 하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역 근처 카페에서 김 평론가를 만났다.
요즘도 영화를 많이 보느냐는 첫 물음에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영화사에서 시사회 초청장을 보내줘 시간이 되는 대로 자주 갑니다. 노인은 저 혼자이더군요. 허허. 하지만 저는 지금도 현역 평론가라고 자부해요. 영화평론을 쓰지는 않지만 영화사 연구를 하고 논문도 쓰거든요.”
미수를 앞둔 나이이지만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김 고문은 내년에 책 ‘제주영화사’를 낼 예정이다. “초고는 이미 넘겼어요. ‘한국영화배우사’도 1940년대까지 쓰다 중단 상태인데요, 완성해야죠. 한국영화의 기원부터 바로잡는 한국영화사도 새로 쓰고 싶어요.”
그는 “1980~90년대는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빼곤 대부분 신문사에 영화평을 썼다”고 했다. “심지어 한 영화를 두고 신문사 두 곳에서 리뷰 청탁을 받았죠. 시사월간지 ‘신동아’나 문학지 ‘문학사상’ ‘월간문학’에도 영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글을 썼어요. 영화 리뷰가 전성기인 시대를 제가 운 좋게 잘 만났던 거죠.”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봤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1983년부터 모두 15년 동안 공연윤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 전신) 영화 심의를 했으니까요. 최장수 영화 심의위원이었죠.”
영화사연구자 한상언씨가 김 고문 구술을 받아 정리한 텍스트를 토대로 나온 이번 회고록은 영화비평사의 울타리를 넘어 해방 이후 한국 정치·문화사의 속살을 살피는 증언적 가치도 있을 법하다.
제주4·3이 대표적이다. 고향이 제주인 그는 책에 제주도민 6명이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1947년 3·1절 행사를 10살 때 직접 목격한 이야기와 이 행사를 이끈 안세훈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위원장이 임시 통행금지가 내려진 당일 저녁 자신의 집에서 하루 묵었다는 비화를 풀어 놓았다. 당시 제주유림회 소속으로 안 위원장 등과 함께 3·1절 행사를 준비한 그의 부친은 이 사건으로 수배령이 떨어져 4·19가 일어난 1960년까지 13년 동안 제주도를 떠나 도피 생활을 했단다. “부친은 김구 선생을 존경했어요. 해방 이후 제주를 찾은 김구 선생은 자신의 양복 입은 사진을 아버지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죠.” 한학자인 그의 조부가 살던 제주 봉개동 집도 4·3 당시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서북청년단원들은 부친이 없는 집을 수시로 찾아와 값나가는 고려청자나 탁자를 가져가기도 했단다. “부친은 4·19로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서고 경무대에 탄원서를 제출한 뒤에야 제주도로 돌아갈 수 있었죠.”
김 고문은 서라벌예술대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학원’ 등 잡지사 기자와 영화사 태창흥업 기획실장을 거쳐 1969년에 ‘주간조선’ 문화 담당 기자로 특채되었다. 주간조선 기자 시절 그는 눈에 띄는 기획 기사로 잡지 커버를 자주 장식했던 유능한 기자였다. 1971년 그의 딸 돌잔치 때는 ‘트로이카 스타배우’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매니저들이 소문을 듣고 나란히 금반지를 보내왔을 정도로 ‘잘 나가던’ 기자였단다.
1959년부터 영화평론가의 길
1980~90년대 매체 청탁 1순위
90년대 이후엔 영화사 연구 힘써
자유언론 투쟁하다 조선일보서 해직
제주4·3과 전후 다방문화 등 증언
“기원 밝히는 한국영화사 새로 쓰고파”
하지만 그는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눈을 감지 않았다. 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 때 직접 이 신문 광고국을 찾아 문인 자격으로 격려 광고비 5천원(당시 월급 3만원)을 냈고 조선일보 동료들의 제작 거부 투쟁에도 끝까지 동참했다. 그 결과는 해직이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그는 ‘약업신문’ 기자와 일동제약 윤용구 회장 전기 대필 등으로 생계를 해결했단다. “(75년 해직 사태 때) 저는 일간지 기자도 아니었고 특채에 나이도 많은 편이라 굳이 안 나서도 되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기질상 참을 수 없었어요. 언론자유가 훼손되는 불의를 두고 볼 수 없었죠. 저는 그 상황을 4·19의 연장선으로 봤어요. 4·19 때도 우연히 시위에 가담했는데 시위 도중 보니 스크럼이 저를 중심으로 짜였더군요.”
회고록에는 ‘전후 다방문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도 담겼다. 중3 때 당시 최고의 학생잡지 ‘학원’에 시가 실릴 정도로 문재를 인정받은 그는 중학 시절부터 다방을 자주 드나들었단다. “‘백치 아다다’ 작가 계용묵 선생에게 문장 지도를 받기 위해서였죠. 계 선생께서 제주 동백다방의 단골이었거든요. 고3 때인 1955년에는 학생 신분으로 제주 남궁다방에서 제주 최초의 시화전도 열었죠.”
대학생이 되고는 서울 명동 청동다방을 지키던 공초 오상순 시인의 방명록을 문학지로 격상(?)시키는 노릇도 했단다. “다방으로 오 선생님을 찾아가면 으레 방명록에 한마디 쓰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재미가 없어 제가 방명록 표지를 만들고 권두시에 그림도 함께 집어 넣어 방명록을 ‘청동문학’지로 꾸몄죠. 이 ‘청동문학’지 190여권은 현재 건국대 박물관이 보관하고 있어요.”
화제를 돌려 요즘 한국 영화평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논리나 분석력은 우리보다 낫다”며 말을 보탰다. “이유가 있어요. 우리 때는 자료가 없었어요. 극장에서 보고 나면 다시 볼 기회가 없었어요. 당시 영화를 보면서 노트에 마음에 드는 대사를 적고 좋은 장면은 그림까지 그렸어요. 나중에 집에서 보면 이중삼중으로 겹쳐져 해독에 애를 먹었죠. 70년대 후반에 녹음이 가능한 ‘워크맨’이 나오면서 음악과 대사를 다시 들을 수 있어 글쓰기가 훨씬 수월해졌죠.”
그는 좋은 영화평론의 조건으로 문학적 소양과 깊은 인생관, 객관화 능력을 꼽은 뒤 이런 말도 했다. “요즘 영화 평론은 주로 말로 하더군요. 시대의 변화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저는 평론은 글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은 말재주, 수사로 흐르기 쉽잖아요.”
인터뷰를 끝내며 최고로 꼽는 영화가 뭔지 물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러워요. 너무나 많은 영화가 생각나서죠. 한국 영화는 먼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을 꼽을 수 있겠죠. 시대상황과 분단의 비극이 제대로 녹아든 영화입니다. 사실주의 기법에 기반하면서요. 국외 영화로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1936)를 좋아해요. 문명의 변환과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녹여낸 작품이죠. 저는 사람이 살아 있는 영화를 좋아해요. 하지만 요즈음 한국영화 중에는 그런 영화를 보기 힘들어요. 사람은 없고 사건만 있더군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