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 평전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이원규 지음 l 한길사 l 2만8000원
일본 제국주의가 조국을 삼킨 을사늑약의 해(1905년)에 태어나 해방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40년이 채 못 되는 짧은 생애의 전부를 외적의 지배 아래 허덕이면서도 민족 미술사의 토대를 닦고 한국 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무기를 들고 적에게 맞선 것은 아니었으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민족 문화의 정수를 밝힘으로써 겨레의 자존을 챙겼다.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1944)을 일러 “가장 비범했고 가장 열정적인 개척자였으며 가장 고독했던 문화독립운동가 (…) 민족혼을 지킨 불멸의 혼”이라 평하는 까닭이다.
따옴표 속 표현은 새로 나온 ‘고유섭 평전’의 마무리 문장에서 가져왔다. 놀랍게도 고유섭을 다룬 첫 평전인데,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조봉암 평전’ 등을 낸 소설가 이원규가 인천 출신 동향 선배의 발자취를 꼼꼼하게 되살렸다. 우현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되 그에 관한 비판에도 귀를 열어 앞으로의 토론을 위한 출발이 되도록 했다.
우현 고유섭의 청년 시절 자화상. 동국대 중앙도서관 제공
우현은 1925년 경성제대 예과 2회 입시에 합격한 뒤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경성제대의 첫 미학 전공자였다. 나중에 쓴 수필에서 그는 “소학 시대에 조선미술사의 출현을 소망했다”라고 했는데, 어떤 계기에서 어린 소년이 그런 꿈을 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가 인천에서 기차로 통학한 보성고보 시절에는 미술 담당 교사였던 화가 춘곡 고희동의 영향이 짐작되고, 그에 앞서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여러 개 그려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골목을 내달렸다가 사흘간 유치장에 갇혔던 경험이 그의 민족의식의 바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보성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평생의 친구이기도 했던 공산주의자 이강국과 달리 우현은 표면적으로는 학문 연구에 매진했지만, 일제 식민사관에 맞선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서 받은 영향을 미술사에 적용하는 식으로 민족주의를 실천했다. 그가 1938년 잡지에 발표한 수필 ‘아포리스멘’의 이런 대목에 한국 미술사가로서 우현의 자각과 자부가 담겨 있다.
“나는 지금 조선의 고미술을 관조하고 있다. 그것은 여유 있던 이 땅의 생활력의 잉여잔재가 아니요, 누천년 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있다. (…) 나는 가장 진지로운 태도와 엄숙한 경애와 심절(深切)한 동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한쪽의 ‘고상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면, ‘장부의 일생’을 어찌 헛되이 그곳에 바치고 말 것이냐.”
1930년대 후반 개성부립박물관장 시절의 우현 고유섭. 한길사 제공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모교의 미학연구실 조교로 근무하는 한편 문헌 탐구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며 미술사 지식을 온축하던 그는 1933년 평생의 직업이 될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한다. 그에 앞서 1931년 10월에는 서화협회전이 열렸고 동아일보가 우현에게 관전평을 청탁했는데, ‘모군’과 ‘나’의 대화 형식으로 쓴 이 글에서 그가 스승인 고희동의 작품을 과감하게 비판한 것이 눈길을 끈다. 같은 해 1월과 12월에 그는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과 ‘조선탑파 개설’이라는 글을 이강국이 발행인으로 있던 반년간지 ‘신흥’에 발표했다. 한국 미술사를 파고들기로 마음먹고 거의 처음으로 쓴 이 분야의 논문들이었는데, 특히 탑파 연구는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던 필생의 숙제와도 같았다.
그는 한국의 탑파가 목조에서 시작해 석조로 왔으며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평 오층석탑에 목조탑 양식이 충실히 구현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미륵사지탑은 백제 무왕 때 것이고, 왕궁평탑과 부여 정림사탑은 백제 말기 것임을 고증했다. 정림사탑을 통일신라 시기의 것으로 보았던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바로잡은 것이다. 우현은 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서 있는 칠층석탑이 그동안 알려진 개국사터 탑이 아니라 남계원터 칠층석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정몽주가 순절한 곳이 선죽교가 아니라 대묘동 동구의 다리 주춧돌 위라는 사실을 비정했으며,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투견도’가 단원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논거를 들어 주장했다. 조선 초기에 유행한 자기 형태에 ‘분청사기’라는 이름을 붙인 이도 우현이었다.
우현의 이런 업적은 미학연구실 조교 시절부터 방대한 규장각 문헌을 정독하고 필사한 자기만의 노트, 그리고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도 주말이면 도시락을 두세 개씩 싸들고 카메라를 메고 유적을 답사한 열정의 소산이었다. 그렇게 문헌 탐구와 현장 연구를 병행한 끝에 그가 내린 조선 미술의 특징은 “질박, 담소, 무기교의 기교”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조선 미술이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구분되지 않은, 민예적 성격을 지닌다는 그의 주장은 일본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견해를 좇은 ‘식민사학’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한국 미술사라는 박토를 거의 홀몸으로 일군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한국 미술사의 할아버지는 위창(오세창)이고 아버지는 우현”이라는 말로 그의 위상을 표현한 바 있다.
1941년 개성 유지들과 함께한 경주 여행 때 석굴암에서. 맨 왼쪽이 우현 고유섭, 오른쪽 둘째가 우현의 제자로 나중에 동국대 박물관장과 총장을 지낸 황수영이다. 황호중 제공
황수영 전 동국대 박물관장과 진홍섭 전 이화여대 박물관장,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우현의 개성 시절 제자들로 ‘개성 삼걸’이라 불린다. 우현이 아까운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뜬 뒤 황수영이 일제 말과 6·25 전쟁의 혼란기를 통과하면서도 스승의 육필 원고를 목숨처럼 지켜서 훗날 책으로 엮어 낸 이야기는 감탄과 존경의 염을 자아낸다. 황수영은 우현이 문무대왕수중릉을 바라보았던 용당포의 토지를 사비로 매입해 스승의 추모비를 세웠다. 비석에는 스승이 이곳을 여행하고 쓴 수필 제목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를 세로로 음각했는데, 평전 지은이 이원규는 ‘나의 잊을 수 없는 바다’라는 제목으로 우현의 글이 실린 개성의 격주간 신문 ‘고려시보’ 1939년 8월1일 치 사진을 제시하며 비명의 오류를 지적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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