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겨레 ‘올해의 책’—국내서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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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진행이 곧 역사의 진보로 이어진다는 순진한 믿음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 나빠지고 살기는 더 팍팍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지난해가 제시한 숙제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올해는 또 새로운 숙제를 우리 앞에 들이민 듯한 느낌입니다. 그렇게 풀지는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숙제를 어떻게든 풀어 보고자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정답이 모두 들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한겨레’ 책지성팀이 1년 동안 읽고 소개한 책들 가운데에서 스무 권을 ‘올해의 책’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국내 저자의 책 10권과 번역서 10권으로 나누었고, 특정 분야나 출판사에 쏠리지 않도록 안배도 했습니다. 책을 고르면서 새삼 책을 쓰고 만들고 읽어 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사코 나빠지려고만 하는 세상에 그나마 제동을 걸어 주는 게 곧 여러분들이라고 믿습니다.
한겨레 책지성팀
전사들의 노래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
비마이너 기획, 홍은전 지음, 훗한나 그림 l 오월의봄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 작가가 박길연·박김영희·박명애·이규식·박경석·노금호 장애인권활동가 6명의 생애를 총천연색으로 복원한 책이다. 뉴스 속에서 투쟁하는 모습으로만 알고 있을 활동가들의 삶의 굽이굽이를 탐색해 그들을 온전하게 담아냈다. 이동권 투쟁부터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까지 한국 장애인권운동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지만, 책은 더 나아간다. 고통과 슬픔에 발목 잡힌 한 인간이 삶을 직면하고 한 발자국 더 내딛는 지점을 세밀하게 포착해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 지도가 되는지” 이야기한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아름답게 교직한, 그야말로 ‘좋은 이야기’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과거사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
장남주 지음 l 푸른역사 독일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작가 장남주가 두 권짜리 두툼한 책을 글과 사진으로 채웠다. 통일 과정을 다룬 2권도 흥미롭지만, 독일의 유대인 박해에 집중한 1권이 특히 인상적이다. 1985년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나치 항복 40주년 기념 의회 연설에서 이날을 항복이나 패전이 아닌 해방의 날이자 기억의 날이라고 선언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자국 역사의 치부를 까발리고 줄기차게 사죄하고 반성하는 데 대한 반발과 저항이 독일에서라고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사)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는 연방 문화부 장관의 말은 과거사를 대하는 독일 정부와 시민 사회의 태도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작품·자료로 떠난 흥미진진 문학기행
김남일 지음 l 학고재 소설가 김남일이 쓴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은 작품 무대를 발로 밟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작품과 자료, 사진을 통한 간접 기행에 해당한다. 휴전선에 가로막힌 평안도와 함경도가 포함되어 있기에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현장을 직접 가지 못하는 대신 작품과 자료에 대한 천착은 한층 밀도가 높아졌다. 조선 망국기에서 해방까지를 배경 삼은 작품들을 샅샅이 훑고 작가와 작품 및 그 무대를 충실히 안내하는 지은이의 공력과 열정에 감탄이 절로 인다. 북녘을 무대로 한 작품들과 그곳 풍광을 담은 사진, 작품 속에 구사된 북방 말투를 접하다 보면 갈 수 없는 땅을 향한 그리움이 새삼 사무친다. 최재봉 선임기자
‘불하받은 권력’ 만든 해방 공간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l 돌베개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곧바로 식민지 한국의 해방과 독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역사학자 정병준은 1945년 해방 공간에서 어떤 힘들이 어떻게 교차하며 ‘현대 한국의 원형’이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해방 공간’을 창출해 한국인들의 자생적 권력으로 등장했던 ‘건국준비위원회’는 일제·한민당·미군정 등으로부터 집요하게 공격받고 실책을 저지르며 힘을 잃어갔고, 미군정은 ‘문고리 권력’에 휘둘려 냉전 시작 이전부터 ‘반탁운동’을 벌이는 등 한반도를 대결 구도로 몰아갔다. 그 결과 해방 공간의 열망은 무력화됐고, 이 땅을 장악한 것은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은 권력’이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가라앉지 않는 섬, 4·3의 제주
현기영 지음 l 창비 제주 4·3으로부터 산 자 또한 산 자는 아니었다. 지난 반세기, 죽어 산 자들이 봉인한 기억을 가까스로 풀어 해원하려던 이들 선두에 작가 현기영(82)이 있고, 후미에 한강(53)도 있었다. “애당초 죽은 사람”이라며 ‘기억하기’를 거부하다 손녀 부부의 설득 끝에 열흘 동안 울며 자신이 경험한 4·3의 참상을 쏟아낸 안창세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배경. 하지만 3만명의 ‘안창세’를 구원 못 하는 한 제주의 4·3은 복원된 게 아니다. 일제 말부터 1948년 해방 제주의 겨울까지 5년 안팎 숱한 제주인들의 시간이 소설 3권에서 “더듬더듬” “천천히” 흐르는 까닭이다. 4·3 작가의 마지막 4·3 소설, 문학적 소명의 표상.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지금 여기’ 여성주의를 위하여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l 교양인 2005년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통해 남성 언어로 길들여진 한국 사회에 균열을 내며 여성주의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18년 만에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으로 페미니즘의 최전선에 섰다. 작가는 ‘지금 여기’ 한국 여성들이 놓인 구조적인 모순을 천착하고, 그 구조 안에서 다양한 대응을 해가는 여성들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여성주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해 적대적인 것을 어떻게 바라볼지, ‘피해자 중심주의’가 왜 여성에게 불리한지 등 첨예한 현안을 두루 다룬다. 양선아 기자
한자, 창조·변형의 복합적 산물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l 사계절 황제의 사관이었던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 모양에서 영감을 얻어 한자를 창제했다는 설은 2세기 초에 나온 최초의 한자 사전 ‘설문해자’에서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렇지만 한자는 어느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창작이라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승훈 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교수는 ‘한자의 풍경’에서 “한자의 발전은 단방향의 직선적 계승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가 창조되고 변형되고 또 일부는 도태되는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한자가 추상화·복잡화하면서 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면과 외적 삶 역시 변화하는 과정, 흥미로운 한자 어휘들의 유래 이야기 등을 만날 수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이해할수록 더 경이로운 자연의 신비
운명을 가르는 생명의 레시피
이대한 지음 l 바다출판사 진화유전학의 ‘젊은 기수’ 이대한 성균관대 교수가 첫 단독 저작을 통해 우리를 진화유전학 연구의 최전선으로 안내한다. 인간은 감각할 수 있는 생물학적 세계(‘표현형’)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는 생명 프로그램의 세계(‘유전자형’)를 직접 탐사하는 데에 이르렀다. 지은이는 생명이 마치 스리디(3D) 프린터처럼 똑같은 재료(유전자)를 가지고도 다양한 레시피(유전체)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한 요리(표현형)를 만들어낸다는 데 주목한다. 질병과 지능을 빚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지, 표현이 아닌 행동도 유전하는지, 진화란 궁극적으로 우연인지 필연인지 등 진화유전학의 최전선에서 맞닥뜨린 질문들도 해설한다. 최원형 기자
하위주체에 주목한 고전문학사
박희병 지음 l 돌베개 고전문학자 박희병 교수가 정년을 앞두고 있던 2021년 봄학기 서울대 강의를 책으로 묶었다. 단군신화에서부터 19세기 말까지 고전문학의 흐름을 32개 강의에 담았고, 수강생들과 주고받은 질의응답을 매 강의 말미에 덧붙였다. 지은이는 문학사 속 인간을 크게 세 가지 지평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데, 사회·역사적 지평, 집단적 지평, 젠더적 지평이 그것이다. 그는 특히 여성과 서얼, 중인 같은 “하위 주체”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 고유의 풍속인 토풍과 중화의 영향을 뜻하는 화풍의 길항과 습합을 통해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주체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 것 역시 큰 특징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지적으로 음란한, 이 낯선 소설
김솔 지음 l 문학동네 올해 가장 낯선 소설들의 작가를 꼽으라면 김솔이겠다. (그로선 여일함인가) ‘낯섦’은 삶의 이면, 즉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그 진실이 드러나는 형식이다. 반기는 곳 없는 자본주의 세계를 ‘혈류의 속도’보다 느리게 그러나 끝없이 걷는 자(앤솔러지 ‘전두엽 브레이커’ 수록 단편 ‘걷는 여자, 걷는 남자’)를 통해 생존의 본질을, 문맹임에도 직접 쓴 시와 노래 가사로 구원을 증명하는 자(소설집 표제작 ‘말하지 않는 책’)를 통해선 책과 문자의 본질을 사유시킨다. 대부분의 종족 언어가 소멸한 시대(‘퍼플 케이크’)를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우화이길, 쉽게 읽히길 거부하는, 지적으로 음란한 이 소설들은 더 호명되어야 한다. 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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