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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성냥팔이 소녀가 죽지 않으려면

등록 2023-12-29 05:01수정 2023-12-29 10:18

성냥팔이 소녀의 반격
엠마 캐롤 글, 로렌 차일드 그림, 노지양 옮김 l 다산어린이(2023)

어린이와 청소년이 ‘고전과 명작’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은 유구하다. 반드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등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집착일까, 무지일까. 이런 고전은 시대적 상황이나 이면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 태평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좀 더 자라 문학의 속내를 알아차릴 즈음 만나도 충분하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추운 겨울날 성냥을 팔던 소녀가 쓸쓸히 죽어가는 이야기다. 성냥을 켤 일조차 없는 요즘 어린이 독자가 맨발로 차가운 거리에서 성냥을 파는 소녀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엠마 캐롤의 ‘성냥팔이 소녀의 반격’은 이런 시도를 담은 작품이다.

성냥팔이 소녀 브리디 스위니는 “성냥 사세요”라고 외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거리로 나가 성냥을 팔았다. 브리디의 엄마는 성냥공장에서 1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한다. 돈이 떨어지면 동생 퍼갈도 10시간 동안 공장에서 성냥갑을 조립한다. 오늘 브리디의 바람은 성냥을 다 팔아 푸짐한 저녁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성냥공장 사장인 브라이언트의 마차에 부딪혀 넘어지는 바람에 성냥도, 엄마에게 빌려온 슬리퍼도 모두 흩어져 버린다. 성냥을 팔아 번 몇 푼의 돈도 거리의 부랑아에게 빼앗긴다.

체념에 가까운 절망에 빠져 브리디 역시 성냥을 켜지만 도달한 지점은 달랐다. 첫 성냥에 불을 붙였을 때만 해도 브리디는 부자로 살고 싶었다. 성냥의 마법을 빌려 간 곳은 성냥공장 사장의 집이었다. 그의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은 어디에서 왔는가. 모두 엄마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 성냥팔이 소녀의 자각이다. 두번째 성냥에 불을 붙였을 때 브리디는 가난한 사람도 일한 만큼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어했다. 세번째로 가족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소망한다.

성냥은 1800년대 중반부터 흔하게 팔려나갔다. 단순 노동이 많은 성냥공장에는 여자와 소녀들이 주로 일했다. 이들은 저임금을 받으며 오랜 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심지어 식사도 일하던 자리에서 해야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유독성 화학물질 백린으로 성냥개비를 만든 것. 백린에 노출된 성냥공장 노동자들은 이와 턱이 아팠다. 끔찍한 노동자 착취였다.

동화의 후반부는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에 있었던 ‘브라이언트 앤 메이’ 성냥 공장의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1888년 성냥공장에서 억울하게 해고당한 여성 노동자의 일을 계기로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했다. 사회운동가 애니 베상트가 이 일에 관심을 갖고 공장의 실상을 언론에 알린다. ‘성냥팔이 소녀의 반격’에서도 브리디와 엄마 그리고 동료들이 함께 파업을 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원작과 달리 엠마 캐롤은 현실을 포기하지 않은 소녀를 보여준다. 1845년 안데르센이 쓴 슬프고 감상적인 이야기는 2022년 엠마 캐롤을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 초등 5-6학년.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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