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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권은정의인터뷰무제한] ‘적(的)’자와 싸우고 ‘적자’와 또 싸우고

등록 2006-03-30 17:39수정 2006-03-31 16:40

옷장사·음식점 외도하던 철학도 다시 철학으로
‘쉬운 철학’ 목표로 번역투 정리중
나라가 할 일인데…미친 짓이죠
헤겔책 나흘만에 두권이나 팔렸대요, 하하
쉿 기밀! 5년뒤 아주 놀랍고 중요한 책 나올거에요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철학책 대중화 나선 전응주 이제이북스 사장

문패도 간판도 없이 그저 철문이 하나 있을 뿐이다. 벽 속에 묻힌 듯한 문을 마주보고 서 있노라니 <나니아 연대기>의 주인공 수잔이 벽장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같은 기분이 든다. 동그란 구식 초인종을 무작정 눌러보았더니 놀랍게도 사람이 나오고 책 쌓인 풍경이 뒤로 들어온다. 가정집 반지하층을 빌어 사무실로 쓰는 실내는 매우 검박한 분위기다(철학적으로 말하건대). 이제이 북스(EjB), 평등과 정의의 영어단어 앞자리를 따온 이 출판사는 철학책을 전문으로 펴내는 북하우스다.

인문학 고전을 제대로 번역해내자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생고생을 해온 독자들에게는 참으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이제이 북스는 철학 관련 책들에 한껏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제일 작은 골방에서 전응주(48)사장이 출력해낸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날로그식 원문대조 작업이다.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가칭)> 원고를 잡고 있다.

“지금도 적(的)자와의 싸움이지요. 철학번역에 특히 이 표현이 많아요. 요즘 철학문장 번역 방법을 정립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흔히 꼽는 서양철학 고전이나, 철학자들의 주요 저작만큼은 충실하게, 가급적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작은 체구 전 사장의 큰 목표이다. 그간 철학책 어려워 못 읽겠다는 말이 많았는데, 이제 그 여지를 대폭 줄이겠다는 결심도 굳다. 설익고 애매모호한 번역이 철학서를 틀어잡은 탓에 독자들이 철학과 멀어졌다고 그는 지적했다. 난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다. 어쩌면 나 같은 평범 주부도 철학책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겠군!

“그럼요. 다 사람이 쓴 글인데…. 유명한 말이 있는데,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사유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앵무새도 사유를 하는 것이 아니냐, 철학하는 이들이 말이나 글을 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유가 달리는 이가 많지요. 철학책은 읽다보면 여러가지 재미가 있어요. 논쟁 붙은 거 보면 그들의 속마음도 읽어낼 수 있고….”


사무실 구석구석 책이 쌓여 있다. 비트켄슈타인, 니체, 헤겔, 스피노자, 서양철학사…. 음, 한결같이 쉬워 보이지 않은 책들이구만. 난 겉장을 뒤적이며 “편집이 참 예쁘게 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제이 북스는 출발한 지 5년 되었다. 그동안 내놓은 책은 모두 78종.

“그 중에 24종은 문고판인데 별로 안 팔렸어요. 가볍게 읽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 단행본 중에는 2쇄 찍는 것도 몇 권 있습니다.”

재벌 꿈 접고 인생 직시

전 사장은 상장 받은 초등생의 표정을 짓는다. 돈 안 되는 이쪽 사정을 모를 리 없이 출발한 그는 예상이 빗나가지 않게 철학 전공자이다. 박사학위는 우여곡절 끝에 받지 않았다고. 한 성깔해 보이는 그가 ‘지조’를 지킨 탓일 게다. 대학시절 운동권과 음악판에 ‘기웃’거렸다는 그가 자신의 철학을 헐값에 내놓지 않았다는 심증이 갔다. 그는 ‘보따리장사’ 좀 하다가 무미건조한 학생들 얼굴에 일찍 접고 돈벌이를 시작했다. 옷장사와 음식점. 젊은이들 취향에 맞는 옷가지를 좀 팔았는데 옷 파는 게 철학보다는 확실히 쉬웠다나. 그리고 스파게티를 주로 하는 식당도 했다. 둘 다 괜찮았는데 자기는 원래 꿈이 재벌이었단다. 그렇다면 몇 년 돈 벌다가 다시 철학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인간의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돈 버는 일 말고 내 인생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지요.”

그는 중간 중간 자기 이야기는 지금보다는 십년 뒤에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전문 출판사로 지금까지는 준비단계일 뿐이며 그때쯤이면 이 정도 했구나, 싶은 그런 마음이 들게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때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말 정도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완역해서 낼 작정입니다. 1천쪽이 넘을 겁니다.”

그 책은 자기도 보다가 집어던진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전 사장이 일정표 한 장을 가져다 보여준다. 플라톤 전집 출판계획표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빼곡히 적혀있다. 정암학당이라는 고대철학 연구자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다.

“이 중에 초벌번역이 끝난 것도 있고요.”

플라톤의 대화편 전집이 43편. 뤼시스, 크리티아스, 고르기아스, 메논, 라케스…. 대화편의 제목이 곧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난 처음 알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제자들이 ‘소크라테스께서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며 지은 글이라는 사실도 난 처음 알았다.

“대화편은 당시 아카데미아의 학생들이 서로 배역을 맡아 토론하는 것을 배우는 그런 용도의 책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전 사장은 부산 억양의 빠른 말로 플라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순간 난 철학이야말로 가장 낭만적인 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천년 전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둘러서서 서로에게 열띤 시선을 보내며 자신의 이상을 설파했을 것이다. 그때 에게해에서 불어온 바람이 히마티온 옷자락을 휘날렸으리라. 아득한 시간을 딛고 오늘 여전히 그 말은 살아 숨쉬고 있고 또 앞으로 몇천년 세월을 살아갈 것이다. 무한한 진리탐구의 선상에 우리는 한점으로 서있을 뿐이구나.

학진 특정출판사만 지원 불합리

전 사장은 열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앞으로 펴낼 중요한 책들에 대해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5년 뒤에는 아주 놀랍고 중요한 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밀을 살짝 노출하기도 한다. 철학책을 펴내는 일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확신이 서있는 사람같다.

“우리 국내 철학계에서도 좋은 작품이 나와 외국에 판권을 파는 날이 언젠가는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는 또 다른 ‘적자’와의 싸움, 즉 어려운 형편, 열악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의연하게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든든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 일을 알고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단다.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네.”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책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인으로서 나라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재 학술진흥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해 나오는 번역물을 출판할 수 있는 여건에 대해서다. 지금은 서양철학 책을 특정 출판사 한곳에서만 낼 수 있게 묶어두는 바람에 다른 출판사들은 접근이 어려운 실정이다. 관리 운운하며 만든 규정이라는데 모르는 이가 들어도 공평하지 않은 처사인 듯싶다. 중요한 것은 학문발전을 위한 책 만들기가 아닌가. 자유롭게 조건이 풀어진다면 전 사장은 자신이 갈고닦은 책 솜씨를 한껏 부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과하지 않은 욕심 같다.

그에게 철학책이 무시로 읽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지 물어보았다.

“좋은 사회이지요. 건전한 비판이 나오고,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철학책이 구매력이 있고, 또 교육에서 강조하는 그 사회라면 정말 좋은 나라이지요. 우리도 곧 그런 나라 될 겁니다.”

편집담당 직원이 두 명 있지만 한 달에 한 권 만들기가 힘들다. 사장인 그도 책을 한 권 잡으면 빠르면 석 달, 더 오래 걸리면 여섯 달씩 꼼짝 않고 일해야 한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하느라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몫이 많으면 많을수록 책에 투자를 더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는 것이다.

“힘들지요. 이런 책 만들고 나면 나도 지쳐요. 내가 미쳤다고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지요.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해야지요.”

우리철학 외국에 파는 날까지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퇴근시간 즈음에 영업을 뛰던 직원이 들어와서 낭보를 전한다. “두 권 나갔다”고 보고한다. <헤겔예나시기정신철학>이 가장 최근에 서점에 깔렸는데(정확히 말하면 그냥 ‘꽂아두었다’가 맞는 말이다. 책이 제 넓이 그대로 ‘깔리는’ 것은 그래도 어지간해야 한다) “어, 만 나흘인데 두 권이면 괜찮은 성적이네. 하하하.”

전 사장이 소리 내어 웃는데 진짜 웃는 소리다. 나는 이 책 제목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하나 고민 중인데 그는 다시 골방으로 들어가 원고를 다듬는다. 어쩐지 스피노자가 유리를 가는 모습이 저러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철학을 하는 일은 신념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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