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두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사랑에 대한 시인의 찬미
80년대 ‘광장의 기억’ 여읜 자리를 ‘초탈’로 채웠나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사랑에 대한 시인의 찬미
80년대 ‘광장의 기억’ 여읜 자리를 ‘초탈’로 채웠나
‘과작의 시인’ 김사인(51·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씨가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을 펴냈다.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 이후 무려 19년 만이다.
시집이든 소설집이든 작품집을 묶어 낼 때의 불문율 같은 관행의 하나는 ‘표제작’에 관한 것이다. 수록작 중 한 편의 제목 또는 본문 한 대목을 작품집 전체의 제목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는 이 제목으로 되거나 이 구절을 포함하는 작품이 없다. 관행의 파기인 셈이다.
도대체 이 제목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시집 전체의 기조를 새로운 제목에 담았다는 해석이 무난할 테다. 그렇다면 시집 속에서 ‘가만히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찾아보자.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단숨만 들여마시고요/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옛 일> 부분)
오래 전, 시인이 젊거나 어렸을 적의 어느 여름 밤, ‘가만히 좋아하는’ 여자와 밤길을 걷는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어쩐지 자신들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모독이 될 것만 같아, 다만 “안 그런 척” 팔을 부딪치고 냄새를 들이마실 뿐이다.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간직되어 있을 법한 아련한 추억 한 자락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세 개뿐인 손가락이 민망하다/면봉과 일회용밴드 뭉치를 들고 천원이요 외쳐보나/사는 사람 적다/땡볕에 눈이 따갑다//도토리묵 과부 윤씨가 같이 한술 뜨자고 소릴 지른다/묵국수를 말아내는 윤씨의 젖은 손엔/생기가 돈다/(…)/받지 않는 줄 알면서도/번번이 지전 두어 장을 내밀어본다/윤씨의 환한 팔뚝이며 가슴께를 애써 외면하며/다시 거두는 몽당손이 열쩍다”(<덕평장> 부분)
<옛 일>의 젊은이들이 장터의 장사꾼으로 다시 만난 형국이다. 이 시에서도 ‘몽당손’의 주인과 묵 장수 윤씨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생기 있게 국수를 마는 아낙의 손놀림, 아낙의 환한 팔뚝과 가슴께를 애써 외면하는 사내의 수줍은 눈길에 그 호감은 ‘가만히’ 숨어 있다. ‘가만히 좋아하는’ 것이 반드시 어리고 순수한 영혼들만의 몫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표제작의 관행’ 파기한 시집 제목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조용한 일> 전문)
앞의 두 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리거나 늙었거나 간에 남과 여 사이의 연애감정을 노래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 시가 어떻게 ‘가만히 좋아하는’에 해당하는가. 시 속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렇다 할 목적이나 까닭이 없이 “그냥 있”을 따름인데, 철 이른 낙엽 한 장이 그 곁에 슬며시 내려 앉는다. 그것으로 끝. 이런 싱거운 노릇이 다 있나 싶어 짐짓 화라도 내려는 독자에게 들으라는 듯, 시인은 결론 삼아 할한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거룩하고 고귀한 대상을 향한 요란한 사랑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향한 조용한 사랑을 시인은 찬미한다. 그런 사랑을 달리 ‘연민’이라 이를 수도 있겠다. 따로 표제작이 없는 마당에 사실상 표제작으로 보아도 좋을 듯싶은, ‘풍경의 깊이’라는 제목의 두 작품을 보자.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풍경의 깊이> 부분)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그리하여 슬퍼진 길/(…)/그의 얼굴/고요하고 캄캄한 길”(<풍경의 깊이 2> 부분)
연민의 대상은 약자이기 십상이다. 여기에 사회학적 상상력이 결합되면 80년대 식의 민중시가 빚어진다. 시인 자신 지나간 80년대를 그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았거니와, 하마 80년대 말부터 쓰여진 작품들을 모은 시집에서 그 시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몸만 상하고/돈은 마음같이 모이질 않고/간조가 아직도 닷새나 남았는데/땡겨먹은 외상값은 쌓여만 간다”(<여수> 부분)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돌아가 어둠 속/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그러나 또 무엇일까/고개 돌려도 솟구쳐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무엇일까”(<네거리에서> 부분)
<여수>의 어법이 다소 평이한 사실주의 풍이라면, <네거리에서>는 어쩐지 <푸른 옷>을 비롯한 김지하의 초기시를 떠오르게 한다. 사방으로 뻗은 네거리에 선 화자는 지금 갈등을 겪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허망한 꿈”과 “무심히” 떨어지는 낙엽에 빗대어 상황의 의미를 축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그는 “끝내 몸부림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음을 예감한다. 갈등하는 그는 거듭해서 ‘무엇일까’ 자문하는데, 아마도 80년대적 ‘광장의 기억’이 그 답이 아닐까.
치열하게 살아온 시인의 목소리 오롯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은 역시 지난 시절의 흔적일 터.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의 핵심은 역시 다른 데에 있다. 그 핵심은 아마도 광장의 기억이라든가 사회학적 연민을 여읜 자리에 세워진, 육신마저 허허롭게 벗을 수 있는 초탈의 경지 또는 범용한 일상 속의 신성(神性)에 있을 게다.
“미안하다/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어떤가 몸이여”(<노숙> 부분)
“오는 나비이네/그 등에 무엇일까/몰라 빈 집 마당켠/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아기만 혼자 남아/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땟국물 같은 울음일까/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가는데, 대체/어디까지나 가나 나비//그 앞에 고요히/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나비> 전문)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표제작의 관행’ 파기한 시집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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