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사 ‘건국의 정치’
잠깐독서
‘1352년~1392년, 공민왕 이래 40여년 동안 고려는 전쟁·기근·폭정 속에서도 정치적 문화적으로 매우 창조적인 시대였다. 실천적 지식인들이 국가의 공공성 붕괴, 불교의 부패, 유학의 현실도피로 인한 정신적 공백 현상을 목격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의 고난을 함께 슬퍼했다. 이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문명과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여 정신적 혼란과 정치적 위기를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여 개혁운동에 헌신한 결과, 조선을 건국했다.’
책의 제1장 첫 문단,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이처럼 친절하게 압축해놓았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도록, 또는 이를 설득시키기 위해 동원한 ‘부연 설명’은 무려 840여쪽에 이른다. 때문에 다음 줄을 읽기에 앞서 방대한 책의 내력 아니 내공이 궁금해진다.
이 책은 1997년 저자의 정치학 박사 학위논문을 발전시킨 것으로 마무리되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그나마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7장 ‘조선의 국가 원리와 조선인’은 아직 미완성이란다.
‘인간사는 조각 난 모자이크가 아니라 배경을 가진 풍경처럼 빈틈없이 통합돼 있다’고 전제한 저자는 ‘여말선초의 역사와 정치, 사상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아우른 최초의 연구서’라는 기획 의도대로 500년 왕조의 폐망과 또다른 500년 국가가 탄생하기까지 ‘건국의 원리’를 점묘하듯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의 출발점이 공민왕대부터인 것은 그의 개혁 실패가 고려의 몰락을 재촉했다고 보기 때문. 하지만 그 실패는 ‘왕 혼자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문명의 전환기 속에 필연적이었다. 몽고의 침략 이래 120년 동안 정치적 독립 상실한 고려, 원이 지고 명이 득세하는 대륙의 격변기와 맞물려 젊은 성리학자들과 이성계세력은 전면적 총체적 개혁을 ‘선택’하고 과감한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이 과정을 저자는 한국의 첫번째 르네상스시대라고 이름 짓는다. 1천년을 지배한 불교 신앙에서 이성의 시대로, 초월적 탈속적 불교에서 현세의 인격적 완성과 정치사회적 평화의 달성을 추구하는 이념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조선의 정신은 정몽주, 정치체제는 정도전이 세웠다’로 요약되 듯, 역사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인물들 이야기도 흥미롭다. 요즘 방영중인 텔레비전의 사극 ‘신돈’을 좀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덤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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