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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등단 11년만에 묶어낸 ‘붉은 열정’

등록 2006-05-18 19:26수정 2006-05-19 16:47

전경린 첫 산문집 <붉은 리본>
전경린 첫 산문집 <붉은 리본>
작가 전경린(44)씨가 등단 11년 만에 첫 산문집 <붉은 리본>(웅진지식하우스)을 묶어 냈다. 작가는 산문집에 실린 글들이 “십 년이라는 숲의 미로를 지나오는 동안 굽어지는 길과 갈라지는 길마다 나뭇가지에 하나씩 묶었던 붉은 리본들 같다”고 머리말에 썼다.

전경린 문학의 힘은 마그마처럼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정과 그 열정을 실어 나르는 싱싱하면서도 매혹적인 문장들에 있다. 전경린 소설의 문장들은 단번에 존재와 상황의 핵심에 가 닿는 듯한 적확성과 민첩성, 그리고 새롭고 독자적이면서 동시에 자연스러운 비유의 연쇄를 특징으로 삼는다. 그가 구사하는 비유를 보고 있노라면 단어와 사물 사이에, 또는 단어들과 단어들, 사물들과 사물들 사이에 감추어져 있던 필연적 관련성이 비로소 드러나는 듯한 발견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폭죽과도 같은 비유의 축제는 산문집에서도 여전하여 책의 어느 곳을 들춰 보더라도 놀랄 만큼 참신하고 적실한 비유를 만날 수 있다: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가파르게 쌓아 올려지는 적목처럼 위험해지는 이 삶의 불안정성” “시간은 어디로도 새어 나가지 못하고 머리카락처럼 뭉친 채 빙빙 돈다” “스무 살에게 세상은 오염된 바다의 표피처럼 번들거리기만 했고” “세상이, 귀퉁이가 물에 젖은 얄팍한 비스킷 같다”….

전경린씨의 언어 감각은 가히 생래적이라 이를 법하다. 산문집에 실린 한 글에서 그는 “내가 느낀 많은 느낌들, 스쳐 가는 많은 생각들을 다른 사람과는 변별되는 가장 나다운 고유한 언어로 표현해내고 싶다는 욕망으로 문학을 시작했”노라고 밝혔다. “언어에 대한 욕구에 빠져서 언어와 일종의 연애를 하듯이 썼”다고도 했다. 그는 같은 글의 뒷부분에서 “지금은 언어와의 일종의 연애를 넘어서 소설을 위해 언어가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고는 있다. 그럼에도 언어에 대한 그의 페티시즘적 집착의 흔적은 산문집 이곳저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물론 문학을 택한 것이 오로지 언어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문학에 입문한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삶의 일회성”에 맞서 “보다 지속적인 것, 보다 영원성에 가까운 것, 절대적이고, 결코 반복되지 않는 것을 찾아”서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의 문학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가 생명과 삶을 가차없이 구분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척도를 통해서이다.

“삶은, 실은 순조롭게 죽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은 사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 자체, 곧 죽음을 거스르는 생명력이다. 그러니 삶 속에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반역자이고, 순교자이고, 혁명가이다.”

죽음과 다르지 않은 피상적인 삶을 거부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펄펄 끓는 사랑의 생명력을 추구하겠다는 태도는 전경린 소설 세계를 관통하는 화두와도 같다. “삶이란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무엇을 한사코 사랑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물론 그 사랑에도 끝은 오거니와, 미리 새겨 두어야 할 것은 변하고 끝나는 것이 결코 사랑의 무가치함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의 그런 가변성과 유한성이야말로 거듭 새로워져야만 하는 사랑의 속성을 역설적으로 알려 준다 할 것이다.

“세속의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끝이 온다. 마주 보고 웃는 사이에, 전화를 기다리고 발소리를 기다리는 사이에, 밥을 먹는 사이에, 땀을 흘리며 사랑을 나누는 사이에, 잠든 사이에…. 사랑은 종말을 향해 다가간다. 감각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사랑이 뜻한 바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선택한다기보다는 스스로 결과를 통보받는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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