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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삶의 뒤틀림, 그 달갑잖은 손님

등록 2006-07-13 20:37수정 2006-07-14 17:08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br>
정미경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 9800원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정미경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 9800원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생각의나무)는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인 정미경(46)씨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을 비롯해 단편 일곱이 수록됐다.

정미경씨의 소설들은 생의 한순간을 비집고 든 돌연한 균열과 파국을 증거한다. 정미경 소설의 인물들은 달갑지 않은 손님처럼, 또는 도둑처럼 찾아온 균열과 파국 앞에 흔들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타격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자 몸부림치지만 그 싸움은 대체로 패배로 마무리된다.

표제작의 주인공이 대표적이다. 그에게 닥쳐온 파국은 아내의 비수 같은 한 마디, “당신을 견딜 수 없어”였다. 아내로 하여금 그런 잔인한 말을 내뱉게 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격은 한층 크다. “끝없이 변화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굳건한 어떤 것들의 범주 속에 속한다고 믿었던 것이 한순간 어이없이 뒤틀리는 순간”을 기점으로 그의 삶은 크게 변한다. 아니, 삶이 사실상 끝장난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 버린 뒤 속칭 ‘기러기 아빠’가 된 그의 남은 삶은 껍데기뿐인 삶, 삶이 아닌 삶이었고 그 궁극적 귀결은 외로운 죽음.

버림받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달걀 삼키는 남자>와 <모래폭풍>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를 이룬다. ‘달걀 삼키는 남자’ 스티브가 버려진 고양이들에 집착하는 것은 그 자신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원체험 때문이었다. <모래폭풍>의 여주인공이 사기꾼 바람둥이임에 분명한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것 역시 그 남자에게서 일찍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검은 숲에서>의 여주인공은 미국에 간 뒤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던 약혼자에게서 3년 만에 전화가 오는 바람에 혼란에 빠진다: “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살아 있으면서 삼 년 동안이나 전화를 하지 않게 했을까요?(…)저는 이제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인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버림받음이란 죽음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록된 일곱 편 가운데 가장 긴 분량인 <무화과나무 아래>에서는 파국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여기서 파국은 버림받음과 죽음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살림과 부활의 방식으로 찾아온다. 무슨 뜻인가. 주인공은 분쟁지역 전문 다큐멘터리 피디. 본래 방송국 소속 월급쟁이 카메라맨이었던 그가 현재의 직업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 취재 과정에서 얻은 병이 위중해진 그는 브로커를 통해 낯선 나라 사형수의 신장을 이식받음으로써 되살아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내가 살기 위해 한 사람을 죽게 한 것일까”라는 죄책감과 채무감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위험한 전쟁터만을 찾아 다니는 것. 그런 그를 말리다가 지친 애인은 말한다: “자긴, 그림자를 떼어놓으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달려가는 바보야.” 주인공의 자가 진단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나 자신이 한 편의 비루한 다큐인데(…) 그런 나를 두고 다른 얼굴의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의 주인공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삶 속의 죽음’을 죽고 있는 그와 대비되는 인물이 전쟁터 이라크로 향하는 트럭에 동승한 아홉 살 소년 ‘하산’이다.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오늘처럼 차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해요?”라고 소년은 말하는 것인데, 그 여행이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여행이고 그의 노래와 춤이 생애 마지막 노래와 춤이 될지라도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는, 아니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이 무구한 아이의 실존철학인 것이다. 과연 주인공은 하산에게서 죽지 않고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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