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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꽃 따라 떠도는 ‘벌치기’ 시인

등록 2006-08-24 18:45수정 2006-08-25 14:48

오늘은 이 산이 고향이다<br>
이종만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6000원
오늘은 이 산이 고향이다
이종만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6000원
시인 이종만(57)씨는 벌을 친다. 5월이면 벌통 300개를 끌고 꽃을 따라 전국을 떠돈다. 6~8월 강원도 원주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로열젤리를 거둔다. 9, 10월 벌의 월동 준비를 하고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는 따뜻한 통영에서 벌들을 동면시킨다. 벌들이 겨울잠을 자는 동안 시인은 시를 쓴다. 2~4월 잠들었던 벌을 깨우고, 벌통에 벌을 보충해 준다. 다시 꽃을 따라 길을 나선다. 남녘 바닷가에서 휴전선 부근까지, 화신(花信) 따라 가는 길이다.

“나는 꽃 속에 사는 사람/꽃 속으로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점심 먹다가도 꽃 피었다는 소식이 오면/첫 별 머리에 이고/어둠 속으로 스미듯 달려간다”(<야반도주하듯이 - 양봉일지 7> 부분)

벌 치는 시인의 시 같은 삶을 보노라면, 왠지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이 생각난다. 양들에게 풀을 뜯기며 산을 오르내리는 목동의 외롭고 낭만적인 삶이 벌치기 시인의 삶과 겹쳐서 떠오른다. 그 때문일까. 그가 등단한 지 햇수로 15년 만에 낸 첫 시집 <오늘은 이 산이 고향이다>의 앞머리를 <별>이라는 제목의 시가 장식하고 있는 것은.

“생각하기보다 기도하기로 한다/기도하기보다 미소짓기로 한다/미소짓기보다 손을 잡아주기로 한다”(<별> 전문)

30년 가까이 벌을 치며, 사람보다는 꽃과 자연을 벗 삼아 온 시인의 고독과 진정이 느껴진다. 벌들이 꿀을 따 모으는 동안 나흘에서 일주일까지 적막한 곳에서 한뎃잠을 자며 생활하다 보니 그에게는 자연을 관찰하는 남달리 예민한 촉수가 생겼다.

“귀뚜라미 울음에 방문을 열다//휘영청 달빛에 방문을 열다//소복소복 내리는 눈에 방문을 열다//소리 없는 봄비에 방문을 열다”(<방문을 열다> 전문)

자연은 어린이의 마음이라 했던가. 시인의 자연 시편들은 자주 동시를 닮은 천진성의 상상력을 과시한다.

“바다가 내놓은/엄지발가락/하나//누가 밤새/발톱에다/빨간/매니큐어를 칠했나//통통배 타고/가까이 가보니/동백섬이었네”(<섬> 전문)


그러나 어린이의 마음은 다시 하늘의 마음과 통한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양봉 일에서 그는 삶과 죽음, 개화와 낙화의 분별을 넘어서는 한소식을 얻는다.

“나는 눈보라처럼 날리는/아카시아 꽃잎 사이를 가는 사람/꽃보라처럼 날리는 생을/괴로워하지 않는다//아카시아 꽃 시들어도/벌이 있어 꿀이 있어/꽃은 지지 않는다/꿀 먹은 사람 속에서/아카시아 꽃 다시 환하게 핀다”(<꽃은 지지 않는다 - 양봉일지 9> 부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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