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태우는 강
이화경 지음. 민음사 펴냄. 9000원
이화경 지음. 민음사 펴냄. 9000원
작가 이화경(42)씨가 인도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 <나비를 태우는 강>(민음사)을 내놓았다. 인도 콜카타를 배경으로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사랑의 숨바꼭질을 그린 작품이다. 독일계 중년 남자 쿨만, 싱가포르 청년 첸, 그리고 한국의 여성 준하가 이 다국적 사랑 놀음의 주역들이다. 그들이 만난 것은 런던의 광고 사무실.
“찰나에 몰두하는 순간만이 연애의 본질”(22쪽)이라 믿는 쿨만은 이름만큼이나 쿨한 연애관을 지니고 있다. 그는 첸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사이먼이라는 또 다른 사내 역시 똑같은 강도로 사랑한다. 그에게는 둘을 향한 사랑이 서로 모순되거나 마찰을 일으킬 까닭이 없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덜 집착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방법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첸은? “쿨만의 당당한 늙음 앞에 첸은 자신의 철없고 유약한 젊음이 부끄러웠다.”(15쪽) 문제는 늙음과 젊음의 차원이 아니다. 첸은 비록 자신이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55쪽)다고 말하지만, 그런 사랑이나마 독점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다. 준하의 관찰에 따르면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쟁취하고, 사람을 미혹시키면서 사랑에 절대 휘둘리지 않는 과격한 개인주의자”(36쪽)가 바로 쿨만이다. 그런 쿨만에게 매혹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첸의 몫. 휴가를 이용해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의 집’에 자원봉사를 하러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쿨만의 싸늘한 등을 바라보며 애태우는 첸을 바라보며 애태우는 것이 준하의 역할이다. 셋 중 가장 딱한 처지랄까.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첸과 그런 첸의 사랑을 내팽개친 쿨만과 그 모든 것을 들여다봐야 하는 자신 모두를 싸잡아서”(73쪽) 상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누르고 첸을 찾아 콜카타로 온 준하. 그곳에서 인도의 갑돌이-갑순이 격인 크리슈나와 슈크라를 만나면서 소설은 새로운 방향으로 크게 몸을 튼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처음 만난 크리슈나와 슈크라의 사랑은 얼마나 풋풋하고 순수했던가. 그러나 가난한 브라만 계급인 크리슈나와 부유한 불가촉천민 슈크라 사이의 계급적·경제적 불일치는 이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강제로 갈라 놓고, 크리슈나는 사랑의 아픔도 잊을 겸 원한 맺힌 돈도 벌 겸 한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피혁공장에서 중금속 크롬을 써 가며 가죽 무두질을 하는 동안 그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액을 사기 당하면서 크리슈나는 결국 출국 1년여 만에 화장 처리된 통지서로 가족 곁으로 돌아온다. 결혼한 슈크라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 들었다가 우연히 그 사연을 알게 된 준하는 첸을 찾으려던 애초의 목적도 잊고 두 사람의 사랑과 크리슈나의 죽음을 소재로 일종의 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준하가 이처럼 크리슈나-슈크라 커플의 사연에 매달리는 것은 역시 “한국인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일말의 책임 의식”(114쪽)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소설은 국적과 성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에서 이주노동자 문제로 훌쩍 건너뛴다. 비록 쿨만을 화자로 삼은 것이긴 하지만 “배부르면서도 불안한 유럽 놈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개처럼 떠도는 것을 신경안정제로 삼는 짓거리라니”(177쪽)와 같은 신랄한 야유에서는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읽히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이런 식의 도약이 앞선 사랑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쿨만이라는 인물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애정관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이 현실적 쾌락주의자는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로 다가온다. 소설 속에서 그의 사람됨이 좀 더 생생하고 깊이 있게 묘사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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