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의 비밀
모리 히로미치 지음. 심경호 옮김. 황소자리 펴냄. 2만3000원
모리 히로미치 지음. 심경호 옮김. 황소자리 펴냄. 2만3000원
고대사 왜곡의 온상 ‘일본서기’ 한자·가나 쓰임 분석하며 탄생과 조작 과정 파헤쳐
이 책 결어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 성립의 비밀은 이 책에 의해 해명되었다.” 당당하다 못해 도도하다. 모리 히로미치 교토산업대 중국어학과 교수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720년에 성립된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 <일본서기>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중국인 학자 두 명과 신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공부했던 학자에 의해 서로 다른 시기에 쓰여졌음을 논증했다. 그 도발적 결론에 이르는 연구 내용을 담담한 문장에 학문적 격정을 담아 300여쪽에 걸쳐 옮겨 놓았다.
<일본서기>는 한국인들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일본 고대사는 물론 동아시아 고대사를 논할 때, <일본서기>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료다. 백제를 비롯한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역사서를 인용하거나 직접 그 역사를 적었다. 반면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주된 근거로 일본 학자들이 활용하고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천황을 신격화시킨 대목을 포함해 여러 서술들이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기도 하다.
한국 독자들에겐 다소 아쉬울 수 있겠지만, <일본서기의 비밀>은 이런 역사적 논쟁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모리 교수가 주목하는 ‘비밀’은 따로 있다. “고대사 연구는 문헌비판이다. 말의 연구야말로 문헌을 해명하는 기반이다. 말을 검토하고 문체를 분석하면, 교묘함과 치졸함, 허와 실이 판명나고, 저자의 의도나 입장까지 엿보게 될 것이다.” 모리 교수는 고대 한자의 발음과 문장을 공부한 학자다. 그는 <일본서기> 편찬 당시, 중국 한자의 쓰임과 일본 한자 또는 가나의 쓰임을 비교하면서 <일본서기>의 ‘허와 실’을 구분해 냈다.
그는 <일본서기>에 중국 한문을 사용한 대목과 왜식 한문을 사용한 대목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한자음운학과 한문문체론 등을 이용해 치밀하게 분석했다. 일일이 옮기기엔 너무도 복잡한 그 연구를 위해 모리 교수는 30여년을 바쳤다. 실증적 연구과정은 복잡하지만, 그 결론은 명쾌하면서도 풍부한 영감을 던진다.
모두 30권으로 이뤄진 <일본서기>를 모리 교수는 ‘알파군’(권14-21, 권24-27)과 ‘베타군’(권1-13, 권22-23, 권28-29)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권30으로 구분했다. 뒤이어 각각의 집필자를 추적했다. 알파군을 집필한 이는 중국의 ‘정격 한문’에 정통했지만, 일본 사정에는 어두웠던 당나라 학자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반면 베타군의 <일본서기>를 집필한 이는 ‘정격 한문’에는 서툴지만 불교 한문에 대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학자다.
놀랍게도 모리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집필자를 특정했다. 여러 역사서의 기록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그는 알파군 집필자가 나당연합군과 백제의 전쟁에서 백제의 포로가 됐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온 당나라 학자 ‘속수언(쇼쿠슈겐)’과 ‘살홍각(사츠고가크)’이라고 지목했다. 심지어 두 사람이 분담 집필한 각 권을 구분해 밝혔다.
베타군은 이 두 학자가 죽은 뒤에 쓰여졌다. 이번에는 야마다노후히토미가타(山田史御方)라는 학자가 나서 <일본서기>를 집필했다. 미가타는 신라에 유학한 승려였다. 모리 교수는 “후히토(史)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미가타는 한반도 도래인이 그 조상”이며 “베타군의 표기와 문장에는 신라 한문의 영향이 있다”고 썼다.
심지어 베타군에 사용한 일부 한자는 중국에는 없고 한반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이체자(異體字)이며, 몇몇 문장은 신라시대 이두의 용법과 일치한다는 점도 밝혔다. 신라인이거나 신라인 2세쯤 되는 이가 신라에서 공부한 뒤 돌아와 신라식 한문을 섞어 <일본서기>를 썼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후 마지막 권30은 기노아소미기요히토라는 일본 학자가 마무리했다.
이 연구가 함의하는 바는 작지 않다. 그는 <일본서기>의 여러 역사 서술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신도(神道)가 <일본서기>를 신령하게 떠받들어 자신의 종교관을 설명하는데 이용”한 결과, <일본서기>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닌 신격화된 문자로 받아들여졌음을 비판했다. <일본서기>의 실증연구를 개척했던 18세기 학자 모토이 노리나가에 대해서도 “편찬의 의도를 비판없이 믿었기에 <일본서기>에 창작(조작)이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렸다”고 비판했다. 결국 모리 교수가 이뤄낸 학문적 업적은 <일본서기>의 ‘신화’를 넘어 사실과 허구를 구분해나갈 수 있는 신작로를 개척한 데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이 연구가 함의하는 바는 작지 않다. 그는 <일본서기>의 여러 역사 서술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신도(神道)가 <일본서기>를 신령하게 떠받들어 자신의 종교관을 설명하는데 이용”한 결과, <일본서기>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닌 신격화된 문자로 받아들여졌음을 비판했다. <일본서기>의 실증연구를 개척했던 18세기 학자 모토이 노리나가에 대해서도 “편찬의 의도를 비판없이 믿었기에 <일본서기>에 창작(조작)이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렸다”고 비판했다. 결국 모리 교수가 이뤄낸 학문적 업적은 <일본서기>의 ‘신화’를 넘어 사실과 허구를 구분해나갈 수 있는 신작로를 개척한 데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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