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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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의 ‘전후’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두 인물을 들어 전시에서 전후에 이르는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추적하고 그 의미를 검증하고 있다.” (이하 모두 본문에서 인용)
“지금까지 일본은 전후에 민주주의를 수용해 ‘다시 태어나게’ 됐고, 전시체제에 대한 책임까지도 전후 민주주의의 성립을 통해 청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일본의) ‘민주주의’ 사상의 핵심에 여전히 총력전의 사상이 남아있고, … 일본 국민의 틀 안에서 구성된 ‘민주주의’의 형식은 전시총동원 체제의 사상적 연속이다.
(그래서) 마루야마와 오쓰카를 비판하는 작업은 이 ‘전후적 지평’을 극복해가는 하나의 단계다. (오쓰카와 마루야마가 말하는) ‘국민적 주체’ 이념은 일제의 총력전 체제에서 태어나 전시 총동원 사상의 핵심으로 자라났으며, ‘전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 (물론) 이들이 일본 파시즘에 대한 예리한 비판자로 등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사상이 ‘무엇을 해왔는가’이다. (예컨데) 마루야마는 자신의 사상이 일관된 ‘저항’의 형태라고 진정으로(!) 믿는 듯 보이지만, 이 저항이 실제로는 어떤 의의를 갖는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천황제 비판 지식인 마루야마의 시야에는 조선도 오키나와도 없는 좁게 한정된 일본만 존재 결국 전후세대에서 마이너리티 차별 근거돼
… (마루야마가 천황제를 비판하며 전개한) 전후 계몽이라는 사상운동은 (전시)총력전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계몽’과 ‘운동’이라는 모티브를 전후 세대까지 연결했다. 여기서 이상화된 ‘자기동일적 주체’라는 관념은 타인에 대해서는 지배적이며 자신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행위를 … 정당화하는 장치다. … 1943년에 이르러 … 마루야마는 확실한 전시총동원 논자가 됐고, … (전후에도 그의) 시야에는 조선이나 대만은커녕 오키나와조차 없고 좁게 한정된 ‘일본’만이 존재한다. … (그래서) 일본이 전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은 … 일본 사회에서 총력전 체제가 지속되고 탈식민주의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이러한)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한국의 전쟁과 독재에 구조적으로 기생하며 배후를 보장받았다. … ‘민주주의’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국민’이라는 틀에 갇혀 재일조선인 등 마이너리티를 차별·배제하는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 그래서 ‘주체를 묻는다’는 것은 (전후 내셔널리즘의) 주체가 되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에 내재하는 폭력의 흔적을 해체하는 것이다. … (한국인과 일본인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발화(發話)의 위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발화 위치를 정확히 의식하고 우리를 공통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구조에 물음을 던진다면, 서로 이해하며 대화하는 학문적 토론도 가능할 것이다.” 지은이 나카노 도시오는 전후 일본 양심의 표상인 마루야마와 오쓰카를 ‘정신분석’했다. 추론은 집요하고 근거는 풍부하며 비판은 깊다. 엎어진 마루야마는 ‘충격’이고, 새로 만난 나카노는 ‘놀라움’이다. 마루야마를 잘 모르는 이들은 책을 읽기 전 ‘사전교양’이 필요하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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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한국의 전쟁과 독재에 구조적으로 기생하며 배후를 보장받았다. … ‘민주주의’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국민’이라는 틀에 갇혀 재일조선인 등 마이너리티를 차별·배제하는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 그래서 ‘주체를 묻는다’는 것은 (전후 내셔널리즘의) 주체가 되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에 내재하는 폭력의 흔적을 해체하는 것이다. … (한국인과 일본인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발화(發話)의 위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발화 위치를 정확히 의식하고 우리를 공통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구조에 물음을 던진다면, 서로 이해하며 대화하는 학문적 토론도 가능할 것이다.” 지은이 나카노 도시오는 전후 일본 양심의 표상인 마루야마와 오쓰카를 ‘정신분석’했다. 추론은 집요하고 근거는 풍부하며 비판은 깊다. 엎어진 마루야마는 ‘충격’이고, 새로 만난 나카노는 ‘놀라움’이다. 마루야마를 잘 모르는 이들은 책을 읽기 전 ‘사전교양’이 필요하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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