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
강영숙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9800원
강영숙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9800원
‘풍요로운’ 남쪽 나라 찾아 국경 탈출한 16살 소녀
그러나 그는 남쪽에 가는 대신 또다른 모험을 택한다
이번엔 북쪽 ‘유목민의 나라’가 목적
‘탈북 수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유쾌한 개성 물씬
그러나 그는 남쪽에 가는 대신 또다른 모험을 택한다
이번엔 북쪽 ‘유목민의 나라’가 목적
‘탈북 수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유쾌한 개성 물씬
소설가 강영숙(40)씨가 첫 장편 <리나>(램덤하우스코리아)를 펴냈다. 주인공은 열여섯 살 소녀 ‘리나.’ 그는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국경을 넘어 탈출길에 오른다. 그의 조국은 대륙의 북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나라이고, 그가 향하려는 곳은 “내가 태어난 나라와 같은 말을 쓰지만 때깔이 전혀 다르고 풍요로운 곳이라고 알려진 P국”(344쪽)이다. 그가 남쪽으로 오기 위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작가는 구체적인 나라 이름과 지명을 괄호침으로써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러 흐릿하게 만든다. 그 결과, 국경을 건너는 리나의 탈출 이야기는 영토와 경계를 넘는 탈주와 모험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로 옮겨 가게 된다. 독자는 물론 이 소설을 리나라는 이름의 한 탈북자가 겪는 시련과 고난의 이야기로 읽을 자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작가의 의도는 ‘탈북 수기의 소설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나는 결국 ‘P국’으로 가지 못한다. 소설의 중후반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리나는 대륙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로질러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국경을 넘어 제3국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제3국에서 다시 대륙으로 들어와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대륙을 한 바퀴 돌아 떠나온 지점에 다시 와 있다는 황당한 사실을 안 리나는 울지도 않았다.”(191쪽)
물론 애초에 리나는 ‘P국’으로 가고자 했다. 그곳은 무엇보다 풍요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국경을 넘어 대륙에서 마주친 풍요의 일단을 엿본 리나의 생각이다: ‘내가 가서 살게 될 P국은 이 나라보다 더 잘산다고 했어. 나도 저 여자들처럼 청바지와 구두를 신겠지. 정말 대학에도 갈 수 있을까. 배가 터지게 먹기는 할 거야.’(26쪽)
감시와 단속을 뚫고 몇 개의 국경을 넘는 탈출이 손쉬울 리 만무하다. “국경은 그저 퇴로가 없이 사방이 막힌, 비탈지고 조용한 산길의 일부일 뿐”(13쪽)이라고는 하지만, 그 국경을 넘어 다른 영토로 스며들기까지는 숱한 고난을 거쳐야 한다. 장시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산길을 걸어야 하는 탈출자들이 취하는 행동을 보라.
그것은 ‘탈출’ 자체를 위한 ‘탈출’
“오후가 되자 노인들은 머리카락을 뒤져 이를 잡아먹었고 남자들은 땅속을 파거나 바위를 들쳐 누에처럼 생긴 벌레를 잡아 구워 먹었다.(…)리나도 잠자리 두 마리와 전갈처럼 생긴 벌레 한 마리를 먹었다.(…)사람들은 불 앞에 모여 앉아서 자기 팔을 입으로 물고 있거나, 겨드랑이를 긁어서 나온 것들을 입 속에 넣거나 발 새에 낀 때를 빼먹었다. 머리가 긴 신혼의 여자는 자기 머리카락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48쪽)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은 대로, 탈출자들이 겪는 참상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시련과 시험을 거쳐 리나는 드디어 ‘P국’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뜻밖에도 식구들을 버리고, 아울러 ‘P국’을 향한 꿈도 과감히 접은 채 또 다른 모험 길에 나선다. 그것이 반드시 “너네 나라는 미쳤고 P국은 썩었어”(109쪽)라는 선교사의 말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탈출의 초기 단계에서 식구들과 헤어져 노예노동과 성적 착취에 시달렸으며, 자본주의적 풍요의 더러운 이면을 엿본데다, 특유의 삐딱한 기질과 모험 충동이 결부되어 내려진 이런 결정은 소설 <리나>를 탈북자들의 수기와 뚜렷하게 구분짓는다. “탈출이란 것이 이제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투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혈액이 든 비닐 주머니처럼 느껴졌다.”(117쪽) 이제부터 리나의 탈출은 목표를 향한 다가감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끝없이 유예시키는, 탈출 자체를 위한 탈출로 성격을 바꾼다. 가수·창녀·살인자로의 ‘화려한’ 변신
이후 리나의 삶의 유전은 현란하다 싶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어렵게 넘어간 제3국에서 대륙으로 되돌아온 그는 우연한 계기에 천막 극장의 가수가 되었다가는 집창촌의 창녀로 팔려 가고, 집창촌이 헐린 뒤에는 또 다시 대륙 북동쪽 경제자유구역의 공장 노동자로 전신한다. 소설의 중후반부 이야기는 톈진 정도로 짐작되는 이곳 공단지대에서 펼쳐지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리나는 나중에는 공단 외곽 술집 주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최초의 노예노동과 성적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남자를 죽였던 리나는 이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 리나가 “어쩌나, 난 다시는 살인은 안 하려고 했는데…”(261쪽)라며, 흡사 실수로 예쁜 꽃병을 깨뜨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하는 대목은 이 소설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한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소설의 어조는 결코 어둡거나 심각하지 않다. 리나의 낙천적이며 강인한 성격 탓이겠지만, 극도의 고통과 수난조차 한 바탕 유쾌한 모험담쯤으로 그려진다는 데에 소설 <리나>의 개성이 있다.
모험과 탈출을 사랑하는 리나로서도 공단지대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술집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쑬쑬했다. 그러나 가스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공단은 쑥대밭이 되고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 가운데, 살아남은 리나 역시 화학 가스에 노출되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다. 정부는 공단을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리나는 또 다시 국경을 넘는 탈출 길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 “코뿔소처럼 생긴 유목민의 나라”(340쪽)가 목적지다. 리나의 수중에는 그를 ‘P국’으로 데려갈 만한 달러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리나는 그 돈을 선교사에게 건네며, 이미 ‘P국’에 정착한 식구들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의 탈출이 지닌 근본주의적 속성을 또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시 국경. 소설의 앞과 뒤에는 리나가 넘으려는 두 개의 국경을 묘사한 비슷한 문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은 어느 순간 활짝 열릴 거라고 믿었다.”(11쪽)
“리나는 또다시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348쪽)
리나의 삶은 하나의 국경에 이어 또 다른 국경을 거듭해서 넘는 월경의 연속이다. 소설에는 “세기가 바뀌고 난 후 전 세계의 국경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310~311쪽)는 문장도 있거니와, 몸살은 중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회복과 신생의 가능성 쪽으로도 열려 있지 않겠는가.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은 대로, 탈출자들이 겪는 참상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시련과 시험을 거쳐 리나는 드디어 ‘P국’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뜻밖에도 식구들을 버리고, 아울러 ‘P국’을 향한 꿈도 과감히 접은 채 또 다른 모험 길에 나선다. 그것이 반드시 “너네 나라는 미쳤고 P국은 썩었어”(109쪽)라는 선교사의 말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탈출의 초기 단계에서 식구들과 헤어져 노예노동과 성적 착취에 시달렸으며, 자본주의적 풍요의 더러운 이면을 엿본데다, 특유의 삐딱한 기질과 모험 충동이 결부되어 내려진 이런 결정은 소설 <리나>를 탈북자들의 수기와 뚜렷하게 구분짓는다. “탈출이란 것이 이제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투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혈액이 든 비닐 주머니처럼 느껴졌다.”(117쪽) 이제부터 리나의 탈출은 목표를 향한 다가감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끝없이 유예시키는, 탈출 자체를 위한 탈출로 성격을 바꾼다. 가수·창녀·살인자로의 ‘화려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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