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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인류운명’ 걸고 탁구 한판?

등록 2006-09-21 19:07수정 2006-09-22 13:43

핑퐁<br>
박민규 지음. 창비 펴냄. 9800원
핑퐁
박민규 지음. 창비 펴냄. 9800원
‘한세트’로 맞고 돈 뺏기는 왕따 중학생 못과 모아이
이들의 탁구경기 결과에 따라 ‘인류 절멸’이 결정된다!
“여사는 스코어보드, 세계는 듀스포인트”니까…
작가 특유의 UFO적 상상력·개성있는 비유 빛나
힘센 친구에게 쌍으로 맞고 돈을 빼앗기기 일쑤인 두 명의 ‘왕따’ 중학생이 있다. 매를 맞은 뒤 벌판에 버려진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추스르던 이 소년들이 어느 날 어마어마한 결정이 걸린 경기에 나가게 된다. 얼마나 어마어마하냐고? 인류를 절멸시키고 새 판을 짤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유지할 것이냐 하는 게 그 결정이다. 이만하면 거창하지 않은가?

박민규(38)씨의 새 장편소설 <핑퐁>(창비)은 학교폭력과 왕따 같은 ‘사소한’ 문제를 인류 전체의 운명과 결부시킨다. 게다가 결정의 방식이 고작 탁구 경기라니. 과감한 비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작가 특유의 발랄한 상상력이 그런 비약을 별 무리 없이 이끈다.

각각 ‘못’과 ‘모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두 중학생이 주인공이다. 머리를 맞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못이 박히는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화자, 그리고 남태평양 모아이 섬의 거석 인물상을 닮은 친구가 그들. 못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진술을 들어 보자.

“나는 따의 전형이다. 허약하고, 겁이 많고, 눈에 띄지 않고, 공부도 못한다.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다. 없을 수,밖에. 무관심, 무신경, 무감각, 무소유, 그리고 평소엔 박테리아처럼 숨어 있다가 야, 못! 소리에 반응한다. 화들짝, 절로 몸이 움직인다.”(16쪽)

소설의 앞부분은 못과 모아이가 가해자 ‘치수’에게 “한 세트로 당하고, 한 세트로 불려나오고, 한 세트로 맞는”(12쪽) 장면들에 할애된다. 치수 패거리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돈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또래의 여학생을 내세워 원조교제도 서슴지 않는다. “완력과 폭력, 기만, 조장, 장악, 이용, 유지, 회유, 진압, 설득, 친화, 조종… 그러니까 악하다는 단순한 말로는 치수를 설명할 수 없”고 “무서운 재능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19쪽)는 존재가 바로 치수다. 못은 그런 치수에게 두려움을 넘어 거의 존경의 마음까지 품는다.

세계도,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

ⓒ이장욱
ⓒ이장욱
그런 치수의 폭력에 무력하고 비루하게 당하기만 하던 못과 모아이가 인류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지게 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들이 자신의 고통과 시련을 통해 세계를 보는 안목을 얻었다는 것이 변모의 비결이다. 맞으면서 도를 통했다고나 할까. “세계는 다수결”(28쪽)이며,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29쪽)는 깨달음은 이들에게 불가에서 이르는 ‘한소식’에 해당한다. “(따를 당한다는 건)소외가 아닌 배제”(58쪽)라는 못의 말은 배제된 소수의 희생과 원한 위에서 유지되는 세계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이런 깨달음을 계기로 이들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화하고 그것을 프리즘 삼아 세계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의 책임일까요/무엇보다/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살아가는 거잖아요/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117쪽)

못은 ‘탁구계의 간섭자’를 자처하는 신비한 인물 ‘세크라탱’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 대한 근본적 의문인 셈이다. 세크라탱은 세계의 운행을 탁구경기로 설명하는 사람이다. “역사란 건 스코어보드에 지나지 않아, 즉 탁구의 거대한 기록물이지”(124쪽), 그리고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117쪽) “누군가 사십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118쪽) 그 결과 현재 스코어는 1738345792629921 : 1738345792629920. 역시 듀스 상태다.

순진한 ‘동화적 해법’ 이번에도 반복

이제 못과 모아이는 세크라탱의 주관 아래 인류의 운명이 걸린 탁구 시합에 나간다. 경기의 승자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다. 인스톨인가 언인스톨인가. 탁구 경기를 앞두고 모아이는 못에게 말한다: “핑퐁이란 건, 내 생각에 인류가 깜박해버린 것과 절대 깜박하지 않을 것 같의 전쟁인 셈이야.”(219쪽) 이 지점에서 핑퐁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두 상반된 세계관 사이의 대결로 승화한다. 상대방은 인류를 대리해서 나온 쥐와 새. 스키너의 심리상자에서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 시스템에 길들여진 존재들이다. 두 주인공은 맬컴 엑스와 라인홀트 메스너를 먼저 경기에 내보내지만, 두 위인은 쥐와 새에게 완패하고 사라지며, 세트 스코어 0 : 3, 경기 스코어 1 : 8로 뒤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못과 모아이가 나선다. 경기 결과는 허무하게도 쥐와 새의 과로사에 의한 주인공들의 승리. 자, 이제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카스테라>의 작가 박민규씨의 신작 <핑퐁>은 특유의 개성있는 비유와 경구투 문장들, 그리고 유에프오(UFO)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서브와 리시브로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표현하거나, 아슬아슬한 인류사 자체를 두 세력 사이의 팽팽한 운동경기에 견주는 데에서는 산문의 지리멸렬함을 상쇄할 만한 시적 충동이 번뜩인다. 소설 속 소설로 삽입된 가공의 작가 존 메이슨의 소설 세 편은 원 텍스트에 무리 없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시적 충동과 유에프오적 상상력이 반드시 소설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니 인류 자체를 (언)인스톨한다는 발상은 작가가 세계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현실성 있는 처방이 아닌, 일종의 도피로서의 환상에 의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풍긴다. 결정적인 순간에 대왕오징어나 유에프오 같은 초월적 존재들을 등장시키는 버릇은 소설집 <카스테라>에서 익히 보았던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장치들은 고전 연극에서 말하는 ‘기계의 신’(deux ex machina)을 떠오르게 한다. ‘만능해결사’라고 불린 이 장치는 드라마 내적 논리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다른 국면에서 작가가 손쉬운 해결책으로 등장시키곤 했던 초월적 힘을 가리킨다. 박민규씨의 소설들이 문제의 제기에는 능하지만 그에 대한 해법 제시에서는 동화적 순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단점을 <핑퐁>은 다시금 보여준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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