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박형숙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9800원
박형숙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9800원
박형숙(40)씨의 첫 소설집 <부치지 않은 편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중단편이 묶였다. 이 가운데 유일한 중편인 표제작을 비롯한 네 편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가담했던 이들의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른바 ‘후일담’인 것. 그러나 기왕의 후일담들과는 다른, 그만의 색채가 뚜렷한데, 사랑과 욕망의 프리즘을 통해 그 시절을 돌이켜본다는 점이 그러하다.
표제작은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운동권 선배 ‘피(P)형’에게 보내는-그러나 부치지는 못하는 장문의 편지 형식을 취한다. 편지에서 회고되는 지난 시절은 전형적이다. 금지된 책들을 몰래 읽고, 간첩의 접선을 흉내내서 만나며, 돌멩이와 최루탄이 엉키는 시위에 참여했다가는 지하 술집에서 목이 터져라 혁명을 노래한다. 남자 쪽이 좀 더 전형적이다. 모종의 조직에 들어가 있고, 공장에 위장취업하는가 하면, 결국 조직이 발각되면서 옥살이까지 거친다.
그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여자가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까닭. 그가 개인적 기호를 억누르고, 계급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려 하며, 집회와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에게는 연인과의 입맞춤과 정사가 더 소중했다. 사실은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카페에 앉아 혁명이니 정세니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의 ‘남성’은 바지 위로 불끈 솟아 있지 않았겠는가. 이제 그 시절은 지나갔고, 여자는 부치지 못한 편지를 마무리한다. “어쩌면 당신은 내게 이지러진 꿈의 조각이거나 불완전한 소망이 빚어낸 환영에 불과한지도 모르겠군요.”
조직 사건으로 투옥된 애인과 그 공백을 파고드는 선배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킨 <달빛>, 운동의 시대에 사랑했던 남자와 그의 남동생 사이를 오가는 여자의 이야기인 <여름날의 저물녘>, 그리고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에 대한 기약 없는 사랑의 막막함을 그린 <별이 지는 둑방> 등의 작품에서도 운동과 사랑은 조화롭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거나 심지어 대립하기까지 한다. <봄밤>과 <그리고 다시 눈이 내렸다>는 운동권 사람들을 등장시키지는 않지만, 여성 주인공의 흔들리는 욕망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앞서 소개한 ‘후일담’ 소설들과 통하는 바가 있다. 작가의 1993년 등단작인 <차임벨이 울릴 때>와 <담>은 학교라는 제도의 억압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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