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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심청은 여신, 콩쥐는 영웅

등록 2006-09-28 20:09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고혜경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1000원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고혜경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1000원
전래민담 속 잃어버린 반쪽 찾기 수동적 여성이 아닌
악전고투 속에서도 자신 지킨 인류의 원형질로 재해석
신화와 꿈은 인류의 원형질에 대한 오랜 수수께끼였다. 신화학 박사이자 꿈 분석가인 고혜경씨는 오랫동안 이 수수께끼 풀이에 몰두해왔다. 인간의 참 모습과 영성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이들 상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믿음에서다.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한겨레출판)는 그가 우리 옛 이야기에서 길어낸 7가지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해설서다. 그는 ‘잃어버린 반쪽’인 여성성의 메시지가 옛 이야기 속에 오롯이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남성성만 얘기하는 주류 신화를 뒤집고 여성성을 보탬으로써 인간 개개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좀더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전래 민담인 심청, 콩쥐팥쥐, 해님달님, 나무꾼과 선녀, 공주와 바보 이반, 연이와 버들소년, 머리 아홉 달린 거인의 이야기가 새로 태어났다. 이 안에는 피해자가 없으면서 등장 인물 모두가 자유롭다. 주인공들은 자기 인생과 운명을 남에게 맡겨버리고 눈물짓는 수동적인 여자가 아니라 악전고투 속에서도 자기 안의 빛을 잃지 않는 ‘인류의 원형질’로 자리매김한다.

뒤집어 보자. 심청은 아버지의 행복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희생적인 여성이기보다 ‘가부장을 치유하는 여신’으로 나타난다. 심봉사는 “여성성과 완전히 단절된, 황폐하고 암울한 심리 상태를 가진 이의 전형적인 모습”(56쪽)이다. 반면 심청은 부활하는 여신의 대표 선수격이다. “바다라는 생명의 원천이 심청에게는 무덤이고 또 동시에 자궁”(51쪽)이기에 연꽃 안에 들어있던 청이는 기쁨과 신비로 충만한 완전한 여신으로 거듭난다. 책에 실린 지홍 박봉수 화백의 작품 7점 가운데 <연화에 소녀>(1929)도 이같은 심청의 사정을 소름끼치게 그대로 재현한다.

삶은 밝음과 어둠. 어둠에 빛을 던지면 어둠은 거름이 된다. 설화 속 계모는 두렵고 피하고 싶은 존재. 하지만 알고보면 계모의 주술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생명>(박봉수, 61×80.8, 한지에 진채, 1978). 한겨레출판 제공
삶은 밝음과 어둠. 어둠에 빛을 던지면 어둠은 거름이 된다. 설화 속 계모는 두렵고 피하고 싶은 존재. 하지만 알고보면 계모의 주술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생명>(박봉수, 61×80.8, 한지에 진채, 1978). 한겨레출판 제공
콩쥐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덫에 빠진 소녀가 아니다. 그는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직면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여성 영웅이다. 그의 통곡을 듣고 온 검은 소, 두꺼비, 참새는 모두 하늘과 땅이 보낸 영적 순례의 동반자들이다. 아내를 뺏어간 머리 아홉 달린 거인을 무찌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도 조력자가 등장한다. 남자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나타나는 할머니는 나침반을 쥔 여신이다. 여신의 존재감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은 힘만 믿고 제풀에 쓰러지는 머리 아홉 달린 거인에 가깝다. 실오라기 하나 걸칠 것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약자를 끌어와 결혼하는 나무꾼은 어떨까. 그는 사랑의 원리보다 수직적 원리가 우선하는 사회에서 에로스의 발달이 미숙한 존재였다는 풀이다.

이런 옛 이야기와 겹쳐 등장하는 것이 꿈 분석이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대로 “꿈은 개인의 신화이고 신화는 집단의 꿈”이기 때문이다. 상징 풀이의 과학적 전통은 칼 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아니마 문디’ 즉 ‘세계 영혼’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혼이 깃든 세계, 즉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세계라는 의미다.

지은이는 이같은 옛 이야기와 꿈이 가장 절제된 형식으로 인류에게 간절한 영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지혜의 보고임을 확신한다. 옛 이야기와 꿈의 집은 인간의 집단 무의식이며 시간은 영원한 현재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옛 이야기와 꿈은 모두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구분되지 않는 곳에서 발생하는 ‘실제 사건’인 까닭이다. 옛 이야기와 꿈은 인간 내면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목소리를 일깨운다. “남을 의식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눈을 내면으로 돌려, 내가 지금 가장 목말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라!”(222쪽)는.

고씨는 정통 신화학과 꿈분석의 계보를 이어왔다. 여성 고고학자 마리아 김부타스의 동료, 스웨덴 신화학자 크리스티나 버그렌과 둘도 없는 학문적 벗이며 세계 꿈협회 초대회장 제러미 테일러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신화와 꿈에 대한 지은이의 오랜 연구를 거쳐 탄생한 통합적인 분석은 곧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부활을 예고한다. 위계와 경쟁, 그리고 개발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현대에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통합과 조정, 그리고 본능이 살아있는 여성성이라는 통찰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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