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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발제문] 시민참여가 통합 수준을 가른다

등록 2006-09-29 15:43수정 2006-09-29 17:20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어디가 중도이며 어째서 변혁인가
‘남남갈등에서 한반도 선진사회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보수 또는 진보의 이름으로 흑백논리를 내세워 소모적 논쟁을 키우는 본보기의 하나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다. 물론 이것이 공허한 논쟁만은 아니고 현실적 이해관계가 얽힌 다툼이기도 하지만, 기왕이면 좀더 차원높은 논쟁으로 다툴 것을 다투는 것이 선진사회로 가는 길일 터이다.

국가 정체성을 즐겨 들먹이는 세력 중에는 1987년 이전의 강압체제와 거기서 비롯한 기득권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현실적 위세는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담론 차원에서는 '보수'와 구별되는 '수구'로 돌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에 비해 87년의 의의를 인정하고 6월항쟁 이래의 민주화과정이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고 인식하는 새로운 보수논객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극단론에 비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들 또한 자신이 설정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반대한민국 세력'으로 못박아 공인된 담론의 세계에서 배제하기 일쑤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흑백논리가 보수진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기형적 출발을 문제삼아 오늘날까지도 그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이른바 진보진영 일각에 엿보임은 사실이다. 게다가 진보담론의 또다른 일각에서는 오히려 박세일 교수와 비슷하게-그러나 물론 박교수와 같은 식으로 '배제'를 주장하지는 않으면서-'분단시대적 시각' 대 '대한민국 인정'이라는 이분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일견 다양하게 갈리는 입장이 결과적으로 서로를 굳혀주고 키워주는 형국이 되는 원인의 하나는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이라는 것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다. 한 국가의 정체성은 '역사적 정통성'과 '현재적 정당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것이며, 여러 잣대로 평가한 결과 또한 호적에 적자(嫡子)나 장자(長子)로 올리고 말고 하듯 흑백이 분명한 게 아니라 역사의 진행에 따라 상대적 비중을 달리하기 마련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일제 식민지지배에서 벗어나면서 한반도가 타율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친일세력이 사회적 우위를 점한 국가로 출발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뒤이은 폭압과 전쟁 및 분단고착의 상황에서 이런 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의심하는 이런저런 저항논리에는 각기 그나름의 합리적 근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6·15공동선언은 기본합의서의 모호한 현실인식을 새로이 추인하면서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상통할 수 있는 어느 지점에서 이 혼란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한 것이다. 나 자신 그 접점은 국가연합 중에서도 꽤나 느슨한 연합제에서 우선 찾을 수밖에 없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명백해지리라고 믿지만, 요는 6·15공동선언 자체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꾸준히 향상하는 과정을 대표하는 사건이라는 '친대한민국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한문제'를 둘러싼 입장 차이는 남남갈등을 격화시키는 또 하나의 주요한 쟁점이다. 그리고 이것도 구호를 주고받는 소모적 논쟁을 넘어 좀더 정교한 논리와 곡진한 현실인식을 통해 최대한의 접근점을 찾아볼 대목이다.

'북한문제'에 대한 보수진영의 문제제기는 진보진영의 일부 인사들이 아직도 2000년 이전, 아니 1987년 이전의 '북한 바로 알기 운동' 수준에 머물고 있는 데 대한 비판으로는 유효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인권문제 등 자유주의적 내지 진보적 의제를 논하기 전에, 남북의 교류와 협력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이라는 보수진영 고유의 과제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부터 물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현재 한국현대사의 기본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선진화와 통일 중에서 선진화가 배타적 국정과제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6·15남북공동선언을 폐기해야 한다" 는 단호한 주장이 나온 바 있는데, 공동선언 발표와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가 아니었던들 한반도의 전쟁위협이 고조되고 북의 모험주의적 행동이 강화되며 서해교전 같은 충돌사태만 벌어져도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외국자본이 철수하는 '제2의 IMF사태'를 초래하기 십상이지 않았겠는가. 긴장이 긴장을 부르는 악순환 속에서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쳐댄 2002년 월드컵마저 위태롭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 것이 논증의 효력에는 못미치지만, 한반도의 긴장이 다시 얼마간 높아진 현시점에서도 남과 북, 미국 등 중요 당사자들이 모두 6·15공동선언과 9·19공동성명의 유효성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제신인도가 그나마 유지되고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선진화가 단순히 경제성장이나 국민소득 평균치의 증대가 아니라 정말 남들보다 앞서가는 훌륭한 사회로 진화함을 뜻할 경우 남북대결 구도로의 복귀가 결정적인 패착이 될 것이 뻔하다. 예컨대 한국사회에서 여성이나 이주노동자, 장애인, 동성애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한국 국적을 갖지 않았거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해외동포 들에 대한 관심은 국가의 경제발전수준이나 국민들의 교육수준에 비해서 때 세계적으로 낙후된 실정인데, 이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운동이 (여성운동의 경우는 연조가 훨씬 오래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부쩍 활발해진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6·15시대를 맞아 분단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한국사회의 후진적 획일성에 그나마 이 정도의 변화가 온 것이며, 6·15공동선언이 폐기되거나 그 실천에 심각한 후퇴가 일어날 경우 가부장주의와 군사문화, 성장지상주의의 온갖 폐해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위에 열거한 여러 집단의 권리를 말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북녘 주민들의 인권 문제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른바 '북한인권문제'는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논객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현안인데, 남쪽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이른바 진보진영이 유독 북녘 주민이나 탈북 동포들의 인권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이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옳다. 실제로 나는 그러한 '이중잣대'와 '위선'에 대한 비판이 적중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중잣대' '위선' 등은 말로는 보편적인 인권을 말하면서도 유독 북한의 인권문제에만 열을 올리는 국내외의 상당수 인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양날의 칼이라는 점을 차치하고도, '북한인권문제'에의 관심이 정녕 진실된 관심이라면 그 표현방식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고 심각해야 한다. 총부리를 겨누고 상대방의 생계수단을 봉쇄해놓은 상태에서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일이-예컨대 우방끼리의 비판이나 자신이 주권자로 있는 나라의 정부에 대한 질타에 견줄-응분의 효과를 낼지도 의문이려니와, 무엇보다도 인권의 내용과 그 실현방법에 대한 사람들의 진지한 고민을 담아 각자가 놓인 처지에 따라 그때그때 최선의 해답을 찾아내기를 요구해야 옳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변혁'은 '혁명'의 동의어 내지 위장표현으로 쓰였다. 그러나 사회구조의 급격하고 폭력적인 변화라는 의미의 혁명이-그 내용이 1980년대의 양대 급진세력이 각기 부르짖던 '민족해방'이건 '남한내 민중혁명'이건-오늘날 한국에서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현안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상 모든 곳에서 혁명이 과거지사가 되었다고까지 말한다면 과언일 테고 언젠가 세계 차원에서 또 다른 혁명이 현안으로 등장하지 않는다고 속단할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살벌하게 무장한 세력들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관리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남북 모두 폭력으로 상대방을 병합할 수 없으며 한반도와 나아가 동북아 전역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내부의 폭력혁명을 성공시킬 방도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갈라져 살면서 남한은 미국에 의존한 채 조금씩 '선진화'하고 북은 '북한문제'로 남아서 국제사회의 골치를 썩이면서도 남한이 얼마나 더 잘사는지를 끊임없이 환기해주는 고마운 악역을 감당하는 씨나리오가 달콤하게 여겨질 법도 하다. 하지만 이는 북쪽의 실패가 함께 분단체제에 얽혀들어 있는 남쪽 사회의 선진화에 치명적인 장애가 될뿐더러 자칫 분단체제의 파국적 붕괴로 귀결할 수 있음을 간과한 낭만적인 환상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라는 지구 차원의 상수(常數)에 대해서도 극도로 안이한 계산을 하고 있다.

남한 단독의 선진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공공연하게 신자유주의자로 자처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절대성을 강조하거나 '자유주의' '공동체자유주의' '공화주의' 등을 표방하면서 세계화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식이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신자유주의가 대두한 필연성과 그에 따른 위력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내가 깊은 연구를 한 바는 없지만,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가 부단한 진화를 거쳐 민주주의와 결합하면서 자유민주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했다가 이러한 공동체주의적 성격이 가미된 자유주의로써는 자본축적이 힘들어진 위기상황에 이르자 원래의(즉 민주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이념으로 되돌아간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원래의 자유주의 나름의 역사적 진보성마저 결여한 반민주적, 반공동체적 이념이며, 자유주의가 강조해온 '개인'의 권리를 웬만한 국가보다 거대한 실체인 다국적기업 법인들에게-결과적으로는 주로 이들 법인체에-그대로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건강한 개인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를 목청 높여 규탄하고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변혁에의 궁극적 투항을 재촉하는 수구적 자세일 수도 있다. 아니, 한반도의 통일이 달성되더라도 그것이 곧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이탈이나 세계체제의 변혁을 뜻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나의 지론인바, 바꿔 말하면 한반도의 점진적 통합이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시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이 일방적 투항이 아니고 진정으로 능동적인 참여가 되려면 신자유주의를 견제하며 독자적인 활동공간을 마련하는 범한반도적 프로젝트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분단체제가 좀더 나은 체제로 바뀌는 '변혁'의 과정에서만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공동체자유주의, '진정한 사회주의' 등의 미덕을 포함한 대안적 가치를 실현할 틈새가 확보되며 이를 위한 대중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시민참여야말로 한반도의 통합과 선진사회건설이 진정으로 '변혁'의 수준에 이를지 여부를 가늠할 핵심사항이다. 점진적,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한반도식 통일에 대한 기득권층의 불신과 저항도 바로 이러한 시민참여가 열어갈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 대한 몰이해와 두려움에서 비롯하는 바 크다고 본다. 매사를 권력자와 엘리뜨층이 결정할 것을 전제할 때 점진적인 통일이 결국 한쪽에서는 기능주의적 접근을 통해 야금야금 흡수하는 과정으로 비치며, 다른 한쪽에서는-훨씬 비현실적인 전망이지만-적화통일로 귀결되는 수순으로 보일 수 있다. 하기야 시민참여의 확대로 소수의 잘사는 사람만 점점 더 잘살게 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 제동이 걸리는 것 자체를 '적화' 현상으로 본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분단체제에 대한 성찰과 중도주의적 대응을 통해 대중 스스로가 책임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수반하는 통일사업이라면 그 결과는 아마도 기존의 어떤 이념에도 국한되지 않는 새로운 창안이 될 것이다.

그때 한반도에 이룩되는 사회가 모든 면에서 남보다 우월하리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살기등등한 새 국면에서 분단체제의 질곡과 온갖 후진성을 떨쳐내고 성취한 새로움이라는 점에서, 한반도는 진정 선진사회의 이름에 값할 것이며 인류문명의 일대전환을 추동하는 하나의 거점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는 '선(先)선진화, 후통일'도 아니려니와 '선통일, 후선진화'도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활로요 진정한 중도인 '선진화와 통일의 병행'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6·15공동선언의 화해·협력 및 점진적·단계적 통일 노선에 근거한 선진화 전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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