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영혼의 항복’을 받아낸 대한민국사

등록 2006-10-26 21:43

야만시대의 기록-고문의 한국현대사 1·2·3<br>
박원순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1~2권 2만5000원, 3권 3만5000원
야만시대의 기록-고문의 한국현대사 1·2·3
박원순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1~2권 2만5000원, 3권 3만5000원
일제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고문으로 본 근현대사
우리시대 대표 인권변호사의 치열한 정신 깃든 노작
“사람들이 지옥을 생각해낸 것은 고문에 대한 체험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극심한 고문은 죽음이 희망으로 나타나는, 그치지 않는 고통의 현존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주되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을 주지 않는 것이 고문자의 직업정신이다.”

시인 황지우씨는 1980년 5월 신군부에 끌려가 당했던 고문을 ‘마취 없는 외과수술’이라고 요약한다. “거꾸로 매달린 내 몸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찌할 수 없는 짐승소리가 났다.” 그는 그 ‘외과수술’을 이렇게 시적으로 묘사하지만, 고문의 아득한 비인간성은 시의 언어로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고문피해자 박래군씨는 자신이 당한 고문이 일제하 만주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유사한 ‘인체실험’이었다고 말한다. 또다른 고문피해자 김근태씨는 칠성판에 묶여 생사를 오갈 때 ‘아우슈비츠’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시민운동가 박원순씨가 세 권으로 펴낸 <야만시대의 기록>은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밤낮없이 벌어졌던 ‘더러운 범죄’를 샅샅이 추적해 모은 책이다. 고문에 관한 증언들은 그동안 단말마처럼 터져나오긴 했지만, 그 단말마들을 모아 한 시대의 일그러진 육신을 통째로 보여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1권은 고문에 관한 정의에서부터 법제와 현실, 고문방지를 위한 노력까지 이론적 층위에서 살폈으며, 2권은 일제 강점기에서 이승만 정권까지 고문의 실례를, 3권은 전두환 정권에서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고문의 사례를 모을 수 있는 한 다 모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수없이 많은 아찔한 증언과 목격과 항변과 외침으로, 살가죽이 타는 냄새, 짐승우리의 울부짖음, 인간 폐허의 지옥 풍경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 책은 고문으로 재구성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이식된 것 가운데 하나가 고문이었다. 가장 반인간적인 잔인성은 신체에 대한 거의 생체물리학적인 계산과 합쳐져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육체를 무너뜨리고 정신을 파괴했다. 한 인간의 모든 자존의식과 저항의식을 철저히 붕괴시켜 ‘영혼의 항복’을 이끌어내는 것, 그리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근대적 고문이었다. 일제는 이 잔혹한 무기를 식민지 피지배층을 무력화하는 데 이용했다. 일제의 끄나풀노릇을 하던 친일파들이 그 고문 기술이 그대로 이어받아 이승만 시대에 반독재 통일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똑같은 잔혹함으로 똑같은 야수성으로 다시 적용한 것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 지울 수 없는 상처다. 그 파괴의 기술은 박정희 시대에 더욱 정교해졌고, 정두환 정권에서 더욱 광범위해졌으며, ‘문민정부’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고문피해자들이 세운 정부인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조차 고문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피해자 변호인을 맡기도 했던 지은이는 국가권력이라는 괴물이 언제라도 고문을 효율적인 지배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끝없는 감시만이 그 유혹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문받고 육체와 영혼에 영원한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임을 이 책은 강조한다. 고문은 인간 파괴의 실천이고, 고문이라는 범죄행위에 대한 무관심은 이 인간 파괴의 최종적 실현인 것이다. 지은이가 인용한 외국 시인 할프단 라스무센의 싯구는 이 점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의/ 눈먼 냉담함이다.”

눈 감으면 보이지 않고, 보지 않으면 괴물은 다시 기어나올 것이다. 고문 피해자들의 고통과 절망도 계속될 것이다. 밤샘조사라는 이름의 저강도 고문도 분명 고문이다. 아무리 작은 인권침해라 해도 시민이 거기에 분노할 때만이, 분노로 행동할 때만이 고문이라는 국가 범죄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