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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통 형이상학 무너뜨린 언어철학의 세계 오롯이

등록 2006-10-29 18:30

루크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루크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철학상의 오해와 혼란을
과학적 언어로 그려내려 시도
특출한 철학자의 사유세계 정리
‘소품집’ ‘쪽지’ 등은 첫 번역작
비트겐슈타인 선집 발간

17세기 이래 서양 철학을 지배했던 ‘의식의 문제’는 20세기에 들어와 ‘언어의 문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의식철학은 언어철학으로 전환했다. 이 전환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철학은 그의 두뇌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지평 위에 놓였다. 이 특출한 철학자의 저작을 모은 한국어판 선집이 출판사 책세상에서 나왔다. 이영철 부산대 철학과 교수가 번역한 ‘비트겐슈타인 선집’(전 7권)은 20세기 철학의 향배를 규정한 이 예외적 인간의 사유 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단 한 권의 철학 저작만을 출간했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책의 형태를 갖추기 전 상태에 머물렀다. 그는 머리에서 짜낸 생각을 공책에 기록해 두거나 메모로 남겼다. 일부는 강의실에서 학생이 받아 썼고, 어떤 것은 출간을 염두에 두고 타자본으로 묶었으나 결국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 완벽주의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바꾸고 교정했으며, 결말은 한없이 뒤로 미루어졌다. 따라서 이 선집에 묶인 책들은 한 권만 빼면 그의 후학들이 스승이 남긴 원고더미를 꼼꼼히 따져 주제별·성격별로 갈무리한 결과다.

이 선집 가운데 〈논리-철학 논고〉 〈철학적 탐구〉 〈확실성에 관하여〉 〈문화와 가치〉는 1990년대에 번역자가 우리말로 옮겨 내놓은 바 있다. 이 책들은 그 사이에 새로운 판본이 나오거나 새로운 교정이 추가됐는데, 이번 선집에서 번역자는 이 변화를 담아냈고 기존 번역의 부실한 지점도 보완했다. 〈소품집〉 〈쪽지〉 〈청색책·갈색책〉은 이번에 처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로써 전기부터 말기까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흐름을 끊김없이 살필 수 있게 됐다.

비트겐슈타인은 가벼운 자폐증을 앓았다. 다른 사람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세계가 이 고지능 자폐인에게는 언제나 낯설었다. 그는 낯선 시선으로 친숙한 것 중에서도 가장 친숙한 것, 곧 언어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낯선 세계의 혼란스러움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것은 언어를 투명하게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20대의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의 최전선 포연 속에서 〈논리-철학 논고〉의 원고를 완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상의 모든 오해와 혼란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는 데서 빚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분명히 그으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란 과학적 명제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데, 전통 형이상학의 주제였던 윤리·종교·미학의 영역이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언어를 완벽히 배제한 과학적 언어로 세계를 그림처럼 그려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리-철학 논고〉에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 증명에 성공했다고 확신했던 그는 머리말에서 “나는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라고 철학사상 가장 오만한 선언을 했다. 철학이라는 질병을 완치시켰다고 생각한 그는 즉각 철학계를 떠났다. 10년이 지난 뒤에야 그는 자신의 해결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혹에 부닥쳤고 철학계로 되돌아왔다. 이 선집의 나머지 책들은 이렇게 철학적 문제를 다시 붙들고 고심하면서 쓴 것들이다. 그는 이제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구분을 폐기하고, 언어를 사람들의 삶의 흐름 속에 놓인 도구로 이해하는 방식을 택했다. 언어는 세계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그림’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생활에 사용되는 ‘연장’이 된 것이다. 단어의 의미는 그러므로 그 사용 안에서 파악돼야 하며, 영원한 본질적 의미 같은 것은 없다. 20여년 계속된 그의 연구는 후기의 대표작 〈철학적 탐구〉에 담겼다. 〈철학적 탐구〉는 하나의 명사는 영원불변하는 본질적 이념을 담는다는 전통 형이상학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강력한 형이상학 파괴자로 등장했고 20세기 철학계에 불어닥친 탈형이상학 바람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가 됐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철학적 변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행기 저작이 〈청색책·갈색책〉인데, 이 책의 또다른 번역판(〈청갈색책〉)이 미학연구자 진중권씨의 번역으로 그린비 출판사에서 이 선집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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