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수저
윤대녕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9800원
윤대녕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9800원
윤대녕씨가 세번째 산문에서 찾은 존재의 시원은 ‘어머니’
“우리가 하루 세끼 먹는 음식은 모두 어머니의 젖을 대신”
재료별·주제별 품평의 끝은 ‘어머니와 먹고 싶은 음식’
“우리가 하루 세끼 먹는 음식은 모두 어머니의 젖을 대신”
재료별·주제별 품평의 끝은 ‘어머니와 먹고 싶은 음식’
‘존재의 시원(始原)’에는 어머니가 있다?!
윤대녕(44)씨의 소설 세계는 흔히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로 요약되어 왔다. 첫 소설집 <은어낚시통신>(1994)과 경장편 <추억의 아주 먼 곳>(1996)에서부터 최근작인 장편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2005)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 주인공들은 자신이 비롯된 첫 자리로 은어처럼 거슬러오르곤 했다. 그를 위해 그들은 상징적으로건 실제로건 여행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그녀’로 지칭되는 여자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녀’들은 주인공 남자들의 여행을 촉발하거나 그에 동행하면서 남자들이 삶의 겉껍질을 벗고 감추어진 존재의 진실에 이르도록 돕는 구실을 해 왔다.
윤대녕씨의 세 번째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에서 ‘그녀’의 자리를 ‘어머니’가 대신하는 듯한 양상이 흥미롭다. 음식을 주제로 한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어머니를 표나게 내세우고 있지 않겠는가. 사실 윤씨의 소설에서 가족이란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주인공들은 거의가 혼자 사는 삼십대 남성이었고, 그들에게서 가족의 흔적은 매우 희미했다. 가족이 등장하더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같은 부계이기 십상이었다. 물론 최근 들어서 어머니와 이모, 누이 같은 모계쪽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면 윤대녕 소설의 축이 ‘그녀’에서 어머니로, 부계에서 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밥상에 놓여 있는 수저를 보노라면 사람의 몸과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젓가락은 두 다리를, 숟가락은 얼굴과 닮아 있는 것이다. 원래는 한 몸이었다가 각기 반으로 나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숟가락은 여성을, 젓가락은 남성의 이미지를 내포한다.(…)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만 젓가락과 숟가락이 추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같다. 일심동체로서의 부부처럼 말이다. 받침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수저를 보라. 마치 금슬 좋은 부부가 베개를 베고 사이좋게 누워 있는 것 같지 않은가.”(11쪽)
“그것(=수저)은 일심동체로서의 부부이기도 하지만, 또한 ‘어머니의 두 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수저는 어머니의 온몸이나 다름없다.(…)우리가 하루 세 끼씩 먹는 음식은 모두 어머니의 젖을 대신하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수저질을 배운 순간부터 우리는 늘 불완전한 음식을 먹고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그 불완전함이 곧 삶을 뜻하는 것이다.”(243~4쪽)
집을 짓듯이 음식이야기 풀어내
윤대녕씨의 음식 산문집은 특이하게도 수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각기 여자와 남자를 상징하는 듯한 숟가락과 젓가락의 생김을 두고 ‘금슬 좋은 부부’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재미지다. 수저 다음에는 된장 간장 고추장 같은 장류, 그리고 김치 장아찌 젓갈 같은 ‘기초’ 음식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소 돼지 개 닭 명태 고등어 같은 ‘재료별’ 분류를 거쳐 제주의 다양한 음식들과 섬진강의 봄과 가을 음식, 술 등 ‘주제별’ 음식 소개와 품평으로 나아간다. 마무리는 ‘어머니와 함께 먹고 싶은 음식’.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이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먹고 싶은 음식’이라는 점에 이 음식 산문집의 차별성이 있다.
윤대녕씨의 산문집에서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이 배치되는 방식을 보면 흡사 솜씨 좋은 목수가 집을 짓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수저는 어머니의 젖 또는 두 손을 대신한다. 음식의 처음인 것이다. 건축에 비유한다면 집이 들어설 터요 공간이라 하겠다. 장류와 김치 젓갈 같은 기초 음식들은 건물의 기단부에 해당한다. 재료란 건물의 기둥이요 벽일 테고, 다채로운 주제별 음식들이란 내부 인테리어쯤이 아닐까. 그렇게 꼼꼼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집 안에 아들은 어머니와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그리고는 강화도 꽃게찜, 선운사 앞 동백장호텔 한정식, 경주기와 한우집의 한우, 양파생선초밥을 함께 먹는 것이다. 왜냐하면, 뜻밖에도 “어머니들은 음식에 관해 문외한”(244쪽)이라서 미식가들이 자랑 삼아 입에 올리는 음식들을 맛볼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철학적 근거에서부터 사소한 경제적 또는 생리적 이유 때문에 출분을 일삼고 부모와 가족을 등지고는 했던 사내는 어느덧 그 자신 한 여자의 지아비요 아이 아버지가 되어서야 “이제는 내가 어머니에게 수저로 밥과 반찬을 떠드려야 할 때가 온 것일까”(245쪽) 자문한다. 그리고 자답한다.
“더 늦기 전에, 더 많은 이 땅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 많은 긍휼한 음식들이 어머니의 여생과 편안히 함께했으면 좋겠다.”(250쪽)
작가의 어머니는 아니지만, 먹어 본 경험이 있는 음식들이 소개될 때면 새삼 추억 속의 그 음식을 다시 대접받는 양 흥감한 느낌이다. 제주 성산 일출봉 아래 ‘경미 휴게소’라는 정감 어린 이름의 소박한 식당에서 먹어 본 ‘문어 라면’이 그러하다. 작가가 책에 쓴 대로 이 음식은 이 집에서만 먹을 수 있다. 이 귀한 음식을 맛본 것 역시 작가의 안내로 이 집에 가서였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였고, 두 번 다 별미였다. 삶은 돌문어를 커다란 접시에 썰어 내놓으면 우선 그것을 안주로 소주를 몇 잔 들이켠다.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쯤 문어 삶은 물에 조개를 넣고 끓인 라면이 나온다. 부드러운 국물 맛과 문어 특유의 구수한 향미가 어우러져 참을 수 없도록 웃음이 나온다. 좌중에 행복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듯하다.
어머니에게 밥을 떠드려야 할 때
음식의 생리에서 불교적 구도행을 떠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이십대 중반 무렵 작가의 ‘출가 비슷했던’ 절집 생활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장에 있는 효소의 오랜 소화 작용으로 장아찌의 재료는 원래의 세포 기능을 완전히 잃고 더욱 풍미 있는 음식으로 변한다. 그들은 독 속에 은거하는 동안 스스로 깨달아 나온 자들이라 할 수 있다.(…)나는 몸과 마음이 혼탁할 때면 여전히 장아찌만으로 밥을 먹는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뒤에는 반드시 냉수를 마신다. 장아찌는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의 그 말씀에 값하는 음식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선(禪)이고 법(法)이다.”(52쪽)
“겨울의 황태 덕장은 그 풍경이 장엄하다. 바다에서 잡힌 명태가 깊은 산중에서 눈보라와 햇빛과 어둠에 번갈아 익어가는 과정은 사람이 도를 닦고 법을 구하는 일만큼이나 지난하다.”(89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 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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