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고리타분? 쉽게 쓰면 읽히죠! ‘한시미학산책’ 독자와 소통 신호탄
잠언집·‘죽비’등 고전 속 문장 넘어 문화사로 “글 쓰고 나면 세번 소리내어 읽어요”
잠언집·‘죽비’등 고전 속 문장 넘어 문화사로 “글 쓰고 나면 세번 소리내어 읽어요”
한국의 글쟁이들/⑫ 우리고전 저술가 정민 교수 인문학은 정말 위기일까? 아니면 인문학 바깥에서 비꼬듯 ‘인문학자들의 위기’인 것일까? 적어도 출판 저술의 측면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정민(46)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그 증거다. 이른바 지식기반사회, 콘텐츠 시대를 맞아 인문학적 콘텐츠의 쓰임새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고, 인문학 콘텐츠에 대한 사회경제적 요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인문학이 위기가 아니라 정반대로 최고의 기회를 맞은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정민 교수는 이처럼 인문학이 호기를 맞고 있음을 책으로 입증해내는 저술가다. 정 교수가 처음으로 독서대중들과 만난 것은 1996년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이었다. 한시와 미학이라는 요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법한 두 가지를, 그것도 500쪽에 그림 하나 없는 책으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정 교수는 보여줬다. 곧 고전이란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도전해보고자하는 분야이므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면 고전이 얼마든지 읽히는 장르로 부활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당시 나이 불과 서른 여섯. 이후 나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껏 이 책은 한시 입문서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후 정 교수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책을 쏟아냈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 같은 잠언 소품집부터 <비슷한 것은 가짜다>같은 묵직한 에세이, 교과서속 암기대상이었던 위인들이 생생한 우리 이웃처럼 살아서 등장하는 <미쳐야 미친다>, 고전 속 문장을 곱씹어 들려주는 <죽비소리> 등 내는 책마다 한결같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여기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고전길잡이책도 썼다. 이처럼 모든 연령대를 위한 책, 다양한 버전의 책을 펼쳐보이는 저술가는 실로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한자와 한문과 멀어진 요즘 젊은 세대들이 정민 교수를 통해 고전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다는 점이다. 정 교수가 사람을 놀래키는 점은 저술 작업량도 많지만 항상 책의 수준을 유지하는 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가 다루는 주제의 폭이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가장 고리타분할 것 같은 전공을 가진 고전학자가 가장 모던한 감각으로 무장하고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인문학자들과 달리 정 교수가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아니 그 이전에 그는 왜 이렇게 저술작업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정 교수에게 묻자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그거보다 더 즐거운 게 없으니까.” 정 교수는 지금껏 골프를 쳐본 적도, 스키를 타본 적도 없다. 지식을 탐구하고 글쓰는게 재미있어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식을 통한 창조의 욕구는 묘한 쾌감을 동반해요. 어떤 정보 하나를 찾으면 그 뒤로 연관 정보들이 줄서서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나와요. 심지어 글쓰다가 피곤해서 무심코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 펼쳤는데 논문과 관련된 페이지나 막힌 생각을 뚫어주는 힌트가 들어있는 대목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자주. 그럴 때는 소름이 쫙 끼쳐요.”
의료차트에 자료 빼곡 ‘씨앗창고로’ 정 교수는 궁금한 것, 재미난 것이 생기면 거의 자동적으로 뇌가 작동을 시작한다. 요즘 구상중인 ‘조선의 여행문화’란 주제도 그렇다. 어느날 우연히 근대 일본의 여행문화를 다룬 <에도의 여행자들>이란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우리 조선 선비들은 어떻게 여행을 다녔을까?’ 그러면 곧바로 메모가 시작된다. 제목을 정하고, 논문이되건 책이되건 어떤 내용들이 들어가야 할 지 목록을 짠다. 여행의 준비물은? 경비와 규모는? 놀러갔을 때 놀이의 규칙은?…. 다시 며칠 뒤 2차 메모에 들어가 전체 목차의 얼개를 마련한다. 관련된 스크랩이나 복사물도 덧끼운다. 이렇게 매일매일 정리한 파일을 연구실 곳곳에 비치한다. 정 교수의 한양대 연구실은 한마디로 거대한 파일의 성채다. 이 곳에는 다른 교수 연구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수백개의 의료차트를 둥그렇게 꽂아 빙빙 돌려가면서 꺼내볼 수 있게 만든 차트 보관대다. 자료 정리에 골머리를 앓다가 우연히 보고는 ‘저거다’ 싶어 거금을 주고 그자리에서 산 것으로, 정교수 일생에서 가장 성공한 쇼핑이 됐다. ‘조선의 여행문화’처럼 차트집 하나가 책 한 권의 기획안 모양을 갖추면 여기에 꽂아놓고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마다 꺼내서 보충한다. 정 교수는 이 물건을 ‘씨앗창고’라고 부르는데, 이미 수백개 파일로 가득차서 더이상 끼울 칸이 없는 상태다. 정교수가 이렇게 뽑아낸 아이디어를 글로 쓰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소통’이다. “<한시미학산책>을 펴낸 다음에 시인들이 잘 읽었다며 편지를 보내왔는데 예상 이상이어서 놀랐어요. 그 다음부터 ‘소통을 염두에 둔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논문을 쓰면 우리 분야 여남은명 정도가 읽어보는데,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쓰면 수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무엇이 더 가치있냐가 아니라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정 교수는 내용과 문체에서 모두 ‘전달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대중들은 정교수의 문체가 유려하다고 평하지만, 정작 정교수는 글쓰기에 있어 아름다움을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줄이고, 접속사를 피해 문장을 나눈다.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글의 리듬, 그리고 언어의 경제성이다. 아무리 공들여 쓴 표현이라도 퇴고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도려낸다. 그럴수록 전달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나면 3번 소리 내서 읽어요. 제가 읽고 고치고 아내에게 부탁합니다. 아내가 읽어가다 멈추는 곳이 있으면 그건 문장이 잘못된 거에요. 그런 곳들을 한번 더 고칩니다.” 연암 다산이 ‘지식 정보화’ 스승 더 큰 차원에서는 문체의 힘이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의 힘으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 주제란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들 내면 풍경의 보편성, 그리고 지금 사람들에게도 와닿는 옛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는 곧 문학을 통해 문화를 지향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늘 변하지만 사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인들의 관심사가 지금 우리 고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현실의 이야기가 옛 사람들 이야기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에게 이런 철학을 심어준 사람은 그가 책 속에서 만난 스승 연암 박지원이다. 정 교수는 “연암을 만나 생각하는 방식, 글쓰기 습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콘텐츠에 대한 이해를 배웠다”고 말한다. 연암에 이은 요즘 스승은 다산 정약용. 그가 보기에 다산은 “진정한 지식과 정보의 기획편집자”이며, 그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는 새 스승이다. 새 스승에게 배운 바는 조만간 책으로 나온다. 제목은 <다산의 지식경영>. 다산이 어떻게 당대의 지식과 자신의 문제의식을 책으로 기획, 편집했는지 살펴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통할 수 있는 ‘지식 정보화 작업’의 고갱이를 탐구하는 책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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