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으로 본 ‘일제하 조선인 엘리트’
일제 강점기 조선인 엘리트들은 어떤 사회적 의식을 지녔을까. 조선 총독부의 식민 지배 체제에 관한 사회·경제적 연구는 어느 정도 이뤄졌으나, 그 지배 체제의 상층부를 구성한 조선인 엘리트의 의식을 규명한 연구는 드물었다. 이들이 해방 후 식민 지배에 협력했던 과거를 축소하거나 은폐한 탓도 컸다. 총독부 체제에서 중요한 실무적 기능을 담당했던 이 하위 지배 그룹의 사회적 정체성을 살피는 연구 논문들이 발표됐다.
지난 3일 한국역사연구회(회장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학술대회에서 소장학자들이 발표한 논문들은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 금융조합 이사, 군수 등 엘리트 집단의 자기 의식을 조명했다.
고등문관시험 행정과를 통과해 총독부 고등관료가 된 사람들의 의식을 분석한 장신씨는 이들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데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지만 일본인 관료에 비해 급여나 인사에서 차별받는다는 인식도 지녔다고 밝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1938년 총독부 본청 안의 고등관 230명 가운데 조선인 고등관은 12명에 지나지 않았다. 총독부 고등관은 ‘관계의 꽃’이었다. 따라서 고등관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고등시험 합격이 관계 등용문의 유일한 패스포트’이자 ‘고등시험에 합격하면 아무리 바보라도 내무부장까지는 보장’되는 분위기였으므로, 한 수험생은 고등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는 순간 ‘내 앞날의 인생이 보장된 듯한 안도의 기분’을 느꼈다.”
고등시험 합격은 개인 뿐아니라 그가 소속된 모든 집단의 영예였고 집단의 위상을 높여주는 도구였다. 당시 대학의 우열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은 고등문관 합격자 수였다. 이 때문에 신생 경성제국대학은 학교 차원에서 응시를 적극 권유했다. “또 고등문관 합격은 문중의 자랑이었으며, 출신 지역 또는 고향의 자랑이었다. 각지에서는 고등문관 시험 통과를 축하하는 환영회를 열었다.”
고등문관·군수 등 소속집단 정체성 공유
조선인 자각은 ‘절반의 월급’ 받을 때뿐
식민지배 협조는 불가피 ‘자기 합리화’ 장씨는 고등문관 합격자들의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단순히 가문이 좋거나 수재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고등문관 합격자들이 조선인임을 처음으로 자각하는 것은 첫 월급을 받을 때였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성적도 좋은데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동료의 절반 수준의 월급을 받아 갈 때 조선인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선인 문관들은 이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제도의 문제로 인식했으며,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논문은 조선인 합격자들의 일차적 욕구가 ‘출세’에 있었으며, 엘리트 코스를 거치는 동안 ‘조선인 관료’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동질감을 형성했던 집단과 정체성을 공유했다고 설명했다.
식민지 농민 수탈 기구였던 금융조합의 이사를 분석한 문영주(성균관대 연구교수)씨는 이들이 전문 실무 능력을 지닌 고학력자로서 식민권력의 하위 파트너였고, 근대적 교육과 지식을 통해 규율권력을 내면화하고서 농민을 계몽하는 근대인이었다고 밝혔다. 조선인 이사들이 자신들을 일본인과 비교해 뒤질 것 없는 근대 엘리트로 인식하였으며, 식민지배 협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배에 둔감한 금융조합 이사들의 의식 태도는 조선인 군수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송순(고려대 강사)씨는 조선인 군수들이 “식민지 피지배민족인 조선인이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성공한 조선인으로서 일반 조선 민중들과의 차이를 더 크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등문관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조선인 엘리트들은 끝없는 상승욕구를 기본 동력으로 삼아 출세 지향의 삶을 살았고, 하층 민중에 대한 구별짓기를 꾀하는 근대적 엘리트의 정체성을 지녔으며 탈민족적 사고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논문들은 공통으로 지적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조선인 자각은 ‘절반의 월급’ 받을 때뿐
식민지배 협조는 불가피 ‘자기 합리화’ 장씨는 고등문관 합격자들의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단순히 가문이 좋거나 수재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고등문관 합격자들이 조선인임을 처음으로 자각하는 것은 첫 월급을 받을 때였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성적도 좋은데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동료의 절반 수준의 월급을 받아 갈 때 조선인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선인 문관들은 이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제도의 문제로 인식했으며,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논문은 조선인 합격자들의 일차적 욕구가 ‘출세’에 있었으며, 엘리트 코스를 거치는 동안 ‘조선인 관료’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동질감을 형성했던 집단과 정체성을 공유했다고 설명했다.
식민지 농민 수탈 기구였던 금융조합의 이사를 분석한 문영주(성균관대 연구교수)씨는 이들이 전문 실무 능력을 지닌 고학력자로서 식민권력의 하위 파트너였고, 근대적 교육과 지식을 통해 규율권력을 내면화하고서 농민을 계몽하는 근대인이었다고 밝혔다. 조선인 이사들이 자신들을 일본인과 비교해 뒤질 것 없는 근대 엘리트로 인식하였으며, 식민지배 협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배에 둔감한 금융조합 이사들의 의식 태도는 조선인 군수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송순(고려대 강사)씨는 조선인 군수들이 “식민지 피지배민족인 조선인이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성공한 조선인으로서 일반 조선 민중들과의 차이를 더 크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등문관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조선인 엘리트들은 끝없는 상승욕구를 기본 동력으로 삼아 출세 지향의 삶을 살았고, 하층 민중에 대한 구별짓기를 꾀하는 근대적 엘리트의 정체성을 지녔으며 탈민족적 사고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논문들은 공통으로 지적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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