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이정표’ 따로 또 같이 옮긴 신상희·이선일씨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대표작은 <존재와 시간>이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은 그의 긴 사유의 역사에서 보면 출발점에 놓인다. 50여년에 이르는 그의 저술사 전체를 조망하려면 말년에 출간된 <이정표>를 읽는 것이 좋다고 한다. 1920년대의 ‘초기 사유’부터 1960년대의 ‘후기 사유’까지 하이데거 사유의 변모 양상을 굵직한 점선으로 보여주는 주요 논문 12편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사유의 도정에 놓인 ‘이정표’를 모아놓은 책인 셈이다. 이 책의 번역본이 하이데거 철학 전공자인 두 학자가 함께 옮겨 출간됐다. 신상희(하이데거사상연구소 소장)씨가 <이정표1>을 옮겼고, 이선일(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씨가 <이정표2>를 옮겼다. 하이데거의 철학서는 지은이가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 새로 만들어낸 난해한 개념어들이 숱하게 뿌려져 있어, 우리말로 옮기는 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일 뿐더러 애써 옮겨 놓고도 번역어가 옮긴이의 관점에 따라 아주 다른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사이이자 하이데거 철학 공부의 도반이다. 대학 ‘79학번’ 동기인 두 사람은 1992년 신상희씨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뒤 만나 의기투합했다. “철학을 보는 안목도 비슷하고 마음도 잘 맞아” 학문의 벗이 된 셈인데, 그런 친밀한 관계 덕에 한 책을 나누어 옮길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이데거의 난해한 개념어들을 어떻게 옮길지에 모두 일치한 건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용어들에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끝까지 달라 결국 다른 용어를 선택했다. “책 자체가 논문들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용어가 다르더라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는 없고, 또 그런 번역상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하이데거를 느끼는 방식을 넓게 열어놓는 일”이라고 두 사람은 말한다. 가령, ‘인간 존재’를 가리키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용어 ‘다자인’(Dasein)을 이선일씨는 ‘현존재’로 옮겼고, 신상희씨는 ‘터-있음’으로 옮겼다. “‘다자인’을 현존재라고 옮긴 것은 인간이 ‘존재의 밝음’, 곧 ‘현’(現) 안에 이미 들어서 있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용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밝음 안에 이미 들어서 있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방식’이 바로 현존재인 것이죠.”(이선일) “‘다자인’의 ‘다’(Da)는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열린 터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다자인’, 곧 인간은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열린 터전에 처해 있음’으로 이해돼야 하고, 그것을 줄여 ‘터-있음’이라고 한 것이지요.”(신상희) ‘현존재’이든 ‘터-있음’이든 ‘인간 존재가 이 세계의 존재와 전면적으로 열린 관계 속에 있다’는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이데거 후기 철학에서 중심 용어인 ‘탈존’(Eksistenz)은 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으로서 ‘열려 있음’과 ‘관계 맺음’을 보여주는 ‘다자인’의 다른 말이다. 왜 인간 존재를 ‘탈존’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은 나 중심의 방식으로는 자기를 찾을 수 없고, 탈중심적인 관계 맺음이라는 방식으로만 참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탈’이 지닌 핵심적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은 주-객을 분리하여 ‘주체’를 앞세운 근대 서구의 이분법적 형이상학을 극복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연 사건이자 그 이분법적 형이상학에서 태어난 가공할 기술문명을 근원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유의 변혁이라고 옮긴이들은 말한다. -한길사/2만2000원~2만5000원.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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