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역할
장하준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부·키 펴냄·1만6000원
자유시장은 국가 개입 없는 시장? 시장만이 가격 결정?
‘국가 개입’에 자의적 잣대 들이댄 신자유주의의 ‘허풍’ 반박
장하준 교수 “국가가 갈등을 조정하고 제도를 바꿔야”
‘국가 개입’에 자의적 잣대 들이댄 신자유주의의 ‘허풍’ 반박
장하준 교수 “국가가 갈등을 조정하고 제도를 바꿔야”
며칠 전 통화주의 이론의 대부로 불리던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타계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경제학계에서는 사건이었겠지만, 그 사실이 국내 일반 신문에까지 대서특필된 것은 지구촌을 휩쓰는 신자유주의 물결을 빼고선 설명하기 힘들다. 그가 세운 통화주의가 신자유주의 이론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쓴 <국가의 역할>은 21세기 현재 가장 강력한 경제학 담론이자 정치적 권력이 된 신자유주의 논리를 정면으로 공박하는 책이다. 2003년 영문으로 써 출간한 이 책은 지은이가 다른 한국어판 저작에서 간헐적으로 했던 주장의 이론적 토대를 넓게 보여주는 책이자 신자유주의 광풍 혹은 허풍에 맞서 이론적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지은이는 먼저 신자유주의라는 이론적 괴물의 탄생 계보를 추적한다. 신자유주의는 근대경제학의 적자인 신고전파 경제학과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정략결혼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지은이의 지적이다. 오스트리아 자유주의는 ‘자유’와 ‘기업가 정신’을 대중에게 먹히는 호소력 있는 담론으로 제출했는데, 문제는 이 담론이 경제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권위의 공백을 채워준 것이 신고전파 경제학이었다. ‘시장의 자율적 기능’에 관한 이론으로 학문적 정통성을 얻은 신고전파는 오스트리아 자유사상과 만나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라’라는 독트린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정략결혼 과정에서 신고전파는 ‘국가의 적절한 개입’이라는 자신들의 또다른 이론적 축을 무너뜨렸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국가 개입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신자유주의 이론은 1970년대 후반부터 ‘국가의 개입’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경제학 이론과 실천의 패권을 장악했다. 신자유주의는 국민경제에서든 국제경제에서든 국가나 정부 차원의 모든 인위적인 개입을 경제학적 범죄행위로 몰아부치며 ‘자유 시장’의 논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지은이는 신자유주의 이론이 토대가 대단히 허약한 비과학적인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신자유주의가 진리처럼 모시는 명제들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걸 지은이는 몇 가지 논점을 들어 폭로한다.
국가 개입한 임금·금리가 가격 좌우
가령, ‘자유 시장은 국가 개입이 없는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 진리명제는 사실 근거가 박약하기 짝이 없다. 아동노동 금지, 매연배출 규제, 엄격한 이민제한과 같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시장’의 자연스런 조건으로 보는 것들이 실은 강력한 국가 개입의 결과들이다. 무엇이 인위적인 개입이고 무엇이 자연스런 시장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지극히 자의적임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라는 명제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이른바 자유시장제도가 가장 먼저 발전한 영국마저도 초기 시장 형성에 국가의 강력한 개입이 있었음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시장 가격은 자연스럽게 결정된다’라는 신자유주의의 믿음도 사실과 다르다.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임금과 금리가 국가의 개입에 직접적 영향을 받고 있는 마당에 가격을 시장만의 문제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 개입’과 ‘시장 자유’ 사이에 그어놓은 선은 이렇게 불분명하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불리한 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임의로 나누고 있음을 지적한다. “신자유주이자들이 요구하는 시장의 탈정치화는 자신들이 혐오하는 정치행위, 예컨대 노동조합주의 등을 말살하려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시도일 뿐이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가 실제에서도 무참히 실패했음을 통계를 들어 입증한다. 신자유주의가 ‘나뿐 옛 시대’라고 비난한 1960~1980년 사이 세계 1인당 소득은 3.1%가 성장했지만, 그들의 논리가 관철된 1980~2000년 기간에는 2% 증가에 머물렀다. 개발도상국 1인당 소득증가율도 1960~1980년 3%에서 1980~2000년 1.5%로 줄었다.
특히, 뒷시기에 신자유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던 중국과 인도를 빼면 개도국 소득증가율은 1%에 지나지 않았다. 이 ‘처참한 성적표’는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파산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소득 성적표’도 지참
지은이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을 제안한다. 애초에 경제 시스템의 지도적 구성요소인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발전’과 ‘진보’를 촉진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특히 국가의 구실을 ‘기업가 정신’에서 찾는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제도를 만들고 바꿈으로써 국민 경제의 비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경제의 구조 변동 과정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은 국가가 회피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임무다. 지은이는 국민국가도 새롭게 볼 것을 주문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파도를 막아낼 국민국가의 주체적 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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