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의 ‘낯익은 사랑에 관한 낯선 노래’
사내란 말이 곧 바람이고 이별이고 그리움
그에겐 사랑이란 유난히도 지독하고 격렬한 마음
손가락을 자르고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고 탄식한다
사내란 말이 곧 바람이고 이별이고 그리움
그에겐 사랑이란 유난히도 지독하고 격렬한 마음
손가락을 자르고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고 탄식한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에 관해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게 가능할까? 사랑이란 이미 너무 많이 노래되어서, 이제 와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상투와 통속의 함정을 벗어나기 힘든 것 아닐까? 사랑에 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은 대중가요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사랑에 관한 한 얼마든지 새로운 노래가 가능하다고 대답하는 이가 여기 있다.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을 낸 이병률(39)씨가 그이다. 그러니까 <바람의 사생활>은 사랑에 관한 시집이다. 이별과 그리움에 관한 시집이기도 하다. 시집에서 이병률씨는 남들이 다 해 본 사랑을, 남들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노래한다. 그렇다면 이 시집을 낯익은 사랑에 관한 낯선 노래라 해 두자.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무늬들> 앞부분)
인용한 시에서 ‘나’의 그리움은 유리창과 그 유리창의 물자국으로 번지며, 사랑은 나무와 눈더미를 움직인다. 그리움과 사랑의 확산이요 전염이라 할 만하다. 그것도 감정을 지닌 사람에게로가 아니라 사물에게로의 전염.
그런가 하면 시집의 맨 앞에 실린 <봉인된 지도>는 가히 우주적 스케일의 사랑을 노래한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신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봉인된 지도> 부분)
‘우주적 스케일’의 사랑 노래
감정 없는 사물들이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따라 움직이고 지구와 달 사이의 천문학적 거리가 사랑의 비유로 동원될 정도로 이병률씨에게 사랑은 유난히도 지독한 마음의 일인 성싶다. 이병률 식 사랑 노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격렬함에 있지 않을는지. 자, 이런 시들은 어떤가.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봉인된 지도> 부분) “잘못했으니 다 내 잘못이었으니, 산 늪에 몸을 들여 서러워지고 늪이 다 마르고 몸 갈라져도, 구더기 복받쳐나오는 내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볼 터이니//한장의 이파리처럼 뒤집히는 이 소요, 아주 가끔이었음 한다”(<탄식에게> 부분) 손가락을 자르는 사랑에다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는 탄식이라니. 드러난 생살에 소금을 뿌린 듯 아찔하고 선연한 이 감정을 어찌 해야 좋단 말인가. 사람이 이런 지독한 마음을 거느리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일 것이다. 시인이 차라리 잊기를 갈구하는 것은.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종이를 잊고/나무도 돌도 잊고/아주 넓은 등에 기대/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아주 넓은 등이 있어> 부분)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당신이라는 제국> 부분) 그렇지만 망각을 향한 희구는 그만큼 잊기 어렵다는 뜻의 반어적 표현이 아니겠는지. 사랑에 들린 자에게 관계의 맺힘과 풀림은 영원한 업이요 숙제일 터. “아마도 불을 봤으리라/한번 등을 보이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만경창파의 연(緣)이 있음도 알았으리라/아마도 그 일로 짜게 울다 갔으리라”(<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부분) “당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절벽 혹은 바다로 가서 저 허공으로 던져진 당신 혹은 나를/발버둥치는 몸짓을 낚아채면 되는 것이다”(<절벽 갈래 바다 갈래> 부분) “피의 일//당신을 중심으로 돌았던/그 사랑의 경로들이/백년을 죽을 것처럼 살고 다시 백년을 쉬었다가/문득 부닥친 한 목숨에게/뼈가 아프도록 검고 차가운 피를 채워넣는 일”(<피의 일> 부분) 윤대녕 소설 분위기 풍겨 특히 이번에 인용한 시들에서는 어쩐지 윤대녕 소설의 분위기가 만져진다.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윤대녕 소설의 철학적 주제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는 역시 밀고 당기는 사랑의 게임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이 사내 이병률은 어쩌면 이토록 혹독한 사랑을 앓고/알고 있는 것일까. 사랑은 흔히 ‘계집’들의 일로 치부되기도 하건만, 이 사내에게만은 예외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명은 없다. 그는 사랑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겪고 발설하는 사람이니까. 사랑이란 역시 어찌 할 수 없는 마음의 일이므로. 적어도 이병률이라는 사내에게 있어서, 사내란 말은 곧 바람이고 사랑이며 이별이요 그리움인 것이다.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고드름은 매달렸을까//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사내라는 말은 서롭고도 차가워/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바람의 사생활> 부분)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봉인된 지도> 부분) “잘못했으니 다 내 잘못이었으니, 산 늪에 몸을 들여 서러워지고 늪이 다 마르고 몸 갈라져도, 구더기 복받쳐나오는 내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볼 터이니//한장의 이파리처럼 뒤집히는 이 소요, 아주 가끔이었음 한다”(<탄식에게> 부분) 손가락을 자르는 사랑에다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는 탄식이라니. 드러난 생살에 소금을 뿌린 듯 아찔하고 선연한 이 감정을 어찌 해야 좋단 말인가. 사람이 이런 지독한 마음을 거느리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일 것이다. 시인이 차라리 잊기를 갈구하는 것은.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종이를 잊고/나무도 돌도 잊고/아주 넓은 등에 기대/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아주 넓은 등이 있어> 부분)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당신이라는 제국> 부분) 그렇지만 망각을 향한 희구는 그만큼 잊기 어렵다는 뜻의 반어적 표현이 아니겠는지. 사랑에 들린 자에게 관계의 맺힘과 풀림은 영원한 업이요 숙제일 터. “아마도 불을 봤으리라/한번 등을 보이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만경창파의 연(緣)이 있음도 알았으리라/아마도 그 일로 짜게 울다 갔으리라”(<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부분) “당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절벽 혹은 바다로 가서 저 허공으로 던져진 당신 혹은 나를/발버둥치는 몸짓을 낚아채면 되는 것이다”(<절벽 갈래 바다 갈래> 부분) “피의 일//당신을 중심으로 돌았던/그 사랑의 경로들이/백년을 죽을 것처럼 살고 다시 백년을 쉬었다가/문득 부닥친 한 목숨에게/뼈가 아프도록 검고 차가운 피를 채워넣는 일”(<피의 일> 부분) 윤대녕 소설 분위기 풍겨 특히 이번에 인용한 시들에서는 어쩐지 윤대녕 소설의 분위기가 만져진다.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윤대녕 소설의 철학적 주제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는 역시 밀고 당기는 사랑의 게임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이 사내 이병률은 어쩌면 이토록 혹독한 사랑을 앓고/알고 있는 것일까. 사랑은 흔히 ‘계집’들의 일로 치부되기도 하건만, 이 사내에게만은 예외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명은 없다. 그는 사랑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겪고 발설하는 사람이니까. 사랑이란 역시 어찌 할 수 없는 마음의 일이므로. 적어도 이병률이라는 사내에게 있어서, 사내란 말은 곧 바람이고 사랑이며 이별이요 그리움인 것이다.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고드름은 매달렸을까//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사내라는 말은 서롭고도 차가워/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바람의 사생활> 부분)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