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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오른발은 혁명, 왼발은 희망

등록 2006-11-30 22:29

빅토르 세르주 평전. 수잔 와이즈먼 지음·류한수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1만8000원
빅토르 세르주 평전. 수잔 와이즈먼 지음·류한수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1만8000원
벨기에로 망명한 ‘지하 혁명가’ 아들로 태어나
사회당·아나키즘 거쳐 조국 볼셰비키혁명 참여
스탈린주의 변절에 반기 들다 핍박 끝에 망명
뒤늦게 조명받기 시작한 ‘낙관주의’ 혁명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인간의 집합적 의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이었다. 혁명은 낙관과 희망과 열정의 힘으로 이루어졌지만, 혁명이 한번 터 놓은 역사의 물길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혁명가들의 의지는 역사의 냉혹한 질주에 부딪쳐 깨졌다.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주의로 귀결했다. 인간해방을 꿈꾸던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출세에 눈멀어 변절했고, 더러는 투항했으며 일부는 삶을 포기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간힘 쓰며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소수였다. 빅토르 세르주(1890~1947·본명 빅토르 키발치치)는 그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르주는 정치망명객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 정치망명객이 되어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황제의 근위대 기병이자 ‘혁명적 인민주의자’ 그룹의 지하 혁명가였다. 1881년 차르 암살 사건에 연루돼 서방으로 탈출한 아버지는 1890년 벨게에 브뤼셀에서 아들 빅토르를 낳았다. 빅토르 세르주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1919년 아버지 나라로 들어가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 체제 아래서 투옥과 유형을 겪는 패배자로 떨어졌고, 1936년 서방으로 망명해 10여년 뒤 멕시코에서 죽었다.

세르주는 혁명의 공식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진 존재였다. 스탈린주의와 그 유산이 지배하던 동안 이 반스탈린 투사는 역사의 배경 저 뒤쪽에 유폐돼 있었다. 소련이 붕괴한 1991년에야, 그러니까 그가 태어나고 100년이 지난 뒤에야 이 영원한 혁명가에게 조명이 비쳐들었다. 수잔 와이즈먼(미국 세인트메리대학 정치학 교수)이 2001년 펴낸 <빅토르 세르주 평전>은 뒤늦게 재발견된 이 혁명가를 복권시키고 그의 사상과 혁명의 행로를 밝힌 책이다.

세르주가 오랫동안 인멸 상태에 있었던 것은 어느 당파에도 완전히 몰입하지 않은 그의 독립적 정신에도 원인이 있다. 15살 어린 나이에 벨기에 사회당에 가입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당의 ‘개량주의’에 실망해 아니키즘으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로서 투쟁하던 그는 그의 동지들이 “권력의 문제와 대결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아나키즘에는 혁명에 필요한 의지도 실천도 이론도 부족하다는 걸 절감한 그는 러시아혁명을 이끈 볼셰비키의 강인하고도 전투적인 권력의지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1919년 5월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백군의 반혁명에 대항한 적군의 내전에 참여했다. 세르주는 과거의 동지였던 아니키스트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결국 반혁명을 지지하는 행위가 된다고 보았다.

아나키스트에서 시작해 볼셰비키가 된 세르주는 스탈린 체제 아래서 투옥과 유형을 겪은 뒤 서방으로 망명해 참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남은 일생을 바쳤다.
아나키스트에서 시작해 볼셰비키가 된 세르주는 스탈린 체제 아래서 투옥과 유형을 겪은 뒤 서방으로 망명해 참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남은 일생을 바쳤다.
혁명 속 권위주의 늘상 경계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볼셰비키에 조건없이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볼셰비키의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주의를 언제나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내부에서는 아나키즘의 정서와 볼셰비즘의 정치가 언제나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자유의 실현’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지만, 그 목표를 이루는 일차적 수단은 ‘집단의 규율’이었다. 세르주는 집단의 규율을 혁명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는 “혁명이라는 싹에 든 권위주의라는 벌레”를 경계해마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권위주의라는 벌레가 혁명의 싹을 먹어치우는 쪽으로 전개됐다.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레온 트로츠키를 정점으로 한 ‘좌익반대파’ 진영에 합류했다. 그것은 과거의 동지에게 굴욕당하고 핍박받는 비극을 자청하는 일이었다. 세르주는 11928년 당에서 제명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시베리아로 유형당했다.

1936년 ‘모스크바 대숙청’이 시작되기 직전 러시아를 탈출한 그는 트로츠키와 함께 반스탈린주의 혁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영원한 반항자는 트로츠키와도 완전한 일치를 보지 못했다. 트로츠키와의 불일치는 1921년의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 때 벌써 벌어졌다. 혁명이 보장한 자유와 권리를 달라고 일어선 이 혁명동지들의 봉기를 볼셰비키당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그 선봉에 트로츠키가 서 있었다. 세르주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타협을 통해 진정될 가망이 있었는데도, 당이 봉기를 반혁명세력의 준동으로 규정하고 뭉개버린 것이야말로 미래의 스탈린주의적 권위주의의 출발이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세르주를 혁명의 논리를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수다쟁이 도덕군자’라고 비난했다.

트로츠키와 함께 반스탈린 운동


세르주를 끊임없이 고민에 빠뜨린 문제는 스탈린주의의 반인간적 억압체제가 과연 볼셰비즘의 필연적 결과냐는 것이었다. 그의 최종 결론은 “필연적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당의 권위주의적 중앙집권화에 스탈린주의의 씨앗이 들어 있었지만, 볼셰비즘에는 레닌이 1917~1918년에 세우려고 애쓴 새로운 민주주의의 씨앗도 들어 있었다.” 어떤 씨앗을 키울 것이냐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의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세르주는 관찰자가 아니라 행동가였고 실천가였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희망행 항로”를 틀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종교적 신념과도 같은 낙관주의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혁명가이자 역사가였고 소설가였던 그는 자서전 <한 혁명가의 회상>에서 이렇게 밝혔다. “삶에서 유일한 의미는 역사를 만드는 일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데 있다.” 1943년 쓴 소설 <마지막 시간>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전에 얼마나 여러 번 넘어집니까? 인간의 운명은 밝을 겁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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