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배>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노성두 옮김.안티쿠스 펴냄.2만8000원
15세기 독일 인문주의자의 풍자·교훈시 ‘베스트셀러’
100여가지 바보유형 등장시켜 온갖 어리석음 비꼬아
100여장의 목판화는 독자 스스로 비춰보는 ‘바보거울’
100여가지 바보유형 등장시켜 온갖 어리석음 비꼬아
100여장의 목판화는 독자 스스로 비춰보는 ‘바보거울’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강어귀에는 광인 혹은 바보들을 실은 배가 떠다녔다. 강이나 바다를 낀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 광인·바보 배가 드나들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 대중적으로 알린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5~1984)다. 푸코는 출세작인 된 <광기의 역사>에서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광인은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긴 했지만 사회적 지평에서 완전히 배제돼 폭력적 감금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광인이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감호 시설에 조직적으로 수용된 것은 17세기 대감금 시대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르네상스 시대 광인의 지위를 밝히는 데 푸코가 전거의 하나로 드는 것이 그 시대 독일의 인문주의자 제바스티안 브란트(1458~1521)의 작품 <바보배>(원제 Das Narrenschiff)다. ‘바보배’는 그동안 지금까지 주로 ‘광인들의 배’로 번역돼 왔다. 푸코도 ‘바보’를 ‘광인’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광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사례로 삼았다. 이런 번역상의 혼란은 바보를 뜻하는 말에 광인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바보란 말하자면, 이성이 결여된 사람이고, 이 이성이 결여된 사람은 이성을 상실한 사람, 곧 광인이 되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이성은 기독교의 신(하느님)이 준 지혜를 뜻했는데, 브란트의 작품 <바보배>에서 말하는 바보는 바로 이 지혜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푸코가 인용함으로써 널리 알려졌지만 브란트의 <바보배>는 독일 근세문학에서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작품이다. <바보배>가 출간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보슈)가 <바보배>를 그렸으며, 1509년 또다른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바보 예찬>을 썼다. ‘바보’는 문학·예술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주제어가 됐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인용돼
바보가 이렇게 문학·예술상의 이슈가 된 데는 브란트의 <바보배>가 휘두른 막대한 영향력에서 비롯한 바 크다. 브란트의 <바보배>는 1494년 출간되자마자 맹렬한 속도로 팔려나갔는데, 첫 해에만 3쇄를 찍고 지은이가 사망할 때까지 17판을 냈다. 지은이의 허락을 받지 않은 해적판도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해적판이 얼마나 기승을 부렸던지, 브란트는 새 판을 찍을 때 ‘항의문’을 붙여 “<바보배>를 제멋대로 뜯어고치고 새로운 시구를 구구절얼 매달아놓는 바람에 <바보배>의 본디 모습이 형편없이 뜯겨나갔다”고 출판 해적 행위를 비난하기까지 했다. 브란트는 <바보배>를 애초에 독일어로 썼는데, 출간 3년 뒤 브란트의 제자 야코프 로허가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유럽 전역 인문주의자들의 애독서 목록에 올랐다. 또한 이 책은 프랑스어·저지독일어·네덜란드어로도 번역됐다. <바보배>가 이토록 널리 읽힌 데는 40년 전 요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의 보급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브란트의 <바보배>는 인쇄기술 혁명 후 등장한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바보배>는 바보들을 태운 배가 출항해 바보들의 천국을 찾다가 끝내 난파한다는 얼개로 전개되는 일종의 풍자시이자 교훈시다. 100여 가지 바보 유형을 등장시켜 그들의 온갖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꼰다. 책을 옮긴 미술사학자 노성두씨의 박진감 넘치는 번역은 이 작품의 풍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늙은 바보’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한 대목은 이렇다. “나야 반 송장이 되었지만,/ 내 아들 하인츠가 바보의 대를 물려받아서. 내가 미처 못 다한 짓거리를 마무리 할 걸세./ 부자지간이 어딜 가겠나? 나를 쏙 빼닮아서/바보짓이 썩 어울리고,/ 바보로 살다가 곧 어엿한 남자가 되어서/ 그 아비에 그아들이로다, 하는 말을 듣겠지.”
오늘날 썼다 해도 수긍할 정도
유행에 휩쓸리는 세태를 비난하는 구절은 오늘날의 한 냉소적 시인이 썼다고 해도 수긍이 갈 정도로 현재적이다. “한 가지 유행이 지나가면 새 유행이 꼬리를 무니, 우리네 마음이란 놈이 창피한 줄 모르고/ 참으로 경박하고 오락가락한다네. 이 나라에 유행의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치마가 자꾸 짧아지고 배꼽이 드러나니/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불견일세!/ 거리낌없는 훌러덩 패션으로 예절을 비웃고/ 자연이 감춘 것까지 굳이 까 보인다네!”
브란트에게 르네상스 시대 개성의 표출 양상은 이렇게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탐욕·부패·나태 같은 갖가지 ‘죄악’을 규탄하고 하느님의 지혜로 귀의할 것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중세적 세계관을 지닌 보수적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보수적 가치관을 설파하려고 끌어들이는 지식은 그야말로 르네상스적이다. 고전 그리스·로마의 수많은 철학자·시인·정치가와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해 기독교 성서의 가르침과 교차한다. 그런 전방위적인 지식과 냉정한 풍자정신은 지은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현실 비판 흐름으로 이어져 종교개혁으로 귀결했다. 이 책에는 15세기 말의 판본에 들어가 있던 100여장의 목판화도 그대로 실렸는데, 이 목판화들은 상당수가 당시 독일의 대표적 판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판화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장치이자,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바보가 아닌지 스스로 비춰보도록 마련한 일종의 ‘거울’이다. 지은이 브란트 자신이 ‘머리말’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은 책에 실린 판화에서 자신의 바보 형상을 보겠네. 또 판화에 실린 바보가 어떤 인간인지, 누굴 닮았는지, 어디가 모자라는지 알게 되겠지. 나는 판화를 ‘바보거울’이라고 부르려고 하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가 출간되고 몇 년 뒤 네덜란드 화가 히로니뮈스 보스가 그린 <바보배>. 당대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꼰 브란트의 <바보배>는 대단한 명성을 얻으며 인쇄기술 혁명 이후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브란트에게 르네상스 시대 개성의 표출 양상은 이렇게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탐욕·부패·나태 같은 갖가지 ‘죄악’을 규탄하고 하느님의 지혜로 귀의할 것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중세적 세계관을 지닌 보수적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보수적 가치관을 설파하려고 끌어들이는 지식은 그야말로 르네상스적이다. 고전 그리스·로마의 수많은 철학자·시인·정치가와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해 기독교 성서의 가르침과 교차한다. 그런 전방위적인 지식과 냉정한 풍자정신은 지은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현실 비판 흐름으로 이어져 종교개혁으로 귀결했다. 이 책에는 15세기 말의 판본에 들어가 있던 100여장의 목판화도 그대로 실렸는데, 이 목판화들은 상당수가 당시 독일의 대표적 판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판화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장치이자,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바보가 아닌지 스스로 비춰보도록 마련한 일종의 ‘거울’이다. 지은이 브란트 자신이 ‘머리말’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은 책에 실린 판화에서 자신의 바보 형상을 보겠네. 또 판화에 실린 바보가 어떤 인간인지, 누굴 닮았는지, 어디가 모자라는지 알게 되겠지. 나는 판화를 ‘바보거울’이라고 부르려고 하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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