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의 대담>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이경순 옮김,갈무리 펴냄.1만5000원
일방적 ‘딱지 붙이기’는 제1세계의 타자 관리법
80년대 대담 12건으로 듣는 문화이론가 스피박의 사상
80년대 대담 12건으로 듣는 문화이론가 스피박의 사상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오리엔탈리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이후 가장 강력한 제3세계 출신 문화이론가일 것이다. 그는 서구 제국주의가 남긴 식민주의의 문화적 유산에 도전하는 사상가다. 제3세계 여성의 처지에서 서구 남성 중심의 기존 철학 담론을 해체하는 데 스피박만큼 강력하고 거침없이 덤벼든 사람도 달리 찾기 어렵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탈식민주의를 가로지르는 그의 이론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그는 자신의 글이 난해한 이유를 적절한 용어의 부족에서 찾는다. 서구 중심주의 담론의 문제점을 적발하고 해체하려 할 때 거기에 딱 들어맞는 용어가 없어, 사태를 설명하는 새로운 말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익숙한 용어로 상황을 설명하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독하기 쉬운 글쓰기는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지 못하므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담론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어쨌거나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글쓰기는 스피박 사상에 다가가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스피박의 대담>은 스피박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어 비교적 쉬운 접근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스피박 넘기>를 쓴 스티브 모튼은 스피박을 처음 읽는 이에게 가장 좋은 책으로 <스피박의 대담>을 추천하고 있다. 1984년~1988년 사이 여러 나라에서 한 12건의 대담을 모은 이 책은 스피박이 다른 저작에서 상술하고 있는 주제를 거의 모두 포괄해 설명하고 있다.
스피박이 서구 사회에서 유명해진 것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주저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번역한 것과 관련 있다. 1976년 나온 이 번역본 서문에서 스피박은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해설했는데, 그 서문이 미국과 유럽 지성계의 즉각적인 반향을 얻은 것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스피박의 기본 관점은 데리다의 해체 철학에 힘입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서구 중심, 남성 중심, 이성 중심의 기존 담론의 내적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그 구조물을 주저앉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피박은 이 해체주의적 태도를 제3세계 여성의 관점에서 수용한 뒤 더욱 과격하게 밀어붙여 계급해방이나 여성해방을 이야기하는 모든 거대서사, 거대이론을 비판하는 데 적용한다. 특히, 이론이나 지식의 자기성찰을 철처하게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스피박 사상의 핵심이다.
<스피박의 대담>은 그의 이론적 출발점이 자기 자신의 구체적 현실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담자가 스피박을 ‘제3세계 여성’으로 지칭하는 데 대해 그는 그런 규정이야말로 ‘딱지 붙이기’라며 이렇게 말한다. “1940년대에 (인도) 콜카타라는 대도시의 전문직 중류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을 그런 전문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지구의 반대편에서 온 우리들은 신식민주의의 논리에 바탕을 둔 하나의 제목 아래 그런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항해 커다란 투쟁을 하고 있다,”
스피박이 이런 ‘딱지 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런 식의 일방적 규정이야말로 제1세계 사람들이 타자를 관리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보편이라고 주장하는 명제들은 그 안에 여러 복잡한 사정과 모순을 감춤으로써 권력 행사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스피박의 자신의 처지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생각의 연장선에서 스피박은 제1세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 있기라도 하듯이 행동하고 그런 담론을 펼치는 데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다. 제1세계 지식인 여성과 제3세계 하층 여성은 결코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일 수 없다. 패권적 담론 권력을 휘두르는 서구의 ‘고급 페미니즘’은 오히려 제3세계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