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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러시아미술은 ‘혁명문학’이다

등록 2006-12-21 21:48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1만5000원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1만5000원
이주헌씨, 빙산 속에 숨은 거대한 미술의 보고로 안내
지방도시 돌며 변방 민중 주목한 ‘이동파’ 대표화파
화판을 가로지르는 역사 감수성 풍부한 붓질로 담아
러시아는 문학의 나라, 음악의 나라, 혁명의 나라다. 1917년 일어난 10월 혁명은 20세기 역사의 향배를 결정지었다. 알렉산드르 푸슈킨에서부터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레프 톨스토이를 거쳐 막심 고리키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학은 세계 문학의 젖줄이고 우리에게도 친숙하기 그지없다. 페테르 차이코프스키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는 우리 음악처럼 가깝다. 심지어는 스탈린 시대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러시아 미술은 어떤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마르크 샤갈이 있지만 이들은 서유럽에서 활동한 화가들이다.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 민중과 호흡을 함께한 러시아 화가들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리가 알지 못할 뿐 거대한 미술의 보고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가 쓴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은 동토 깊숙이 숨어 한번도 전모를 내보이지 않던 러시아 미술을 지면에 초대해 그들의 장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게 해주는 책이다.

여러 권의 전작에서 이미 미술 안내자로서 역량을 보여준 바 있는 지은이는 러시아의 정치·문화 쌍두마차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독자의 시선을 끌고 들어간다. 두 도시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 에르미타슈 박물관과 푸슈킨 박물관으로 하여 미술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고도 남을 만한 곳이다. 에르미타슈와 푸슈킨 박물관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자>에서부터 앙리 마티스의 <춤>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사의 걸작 가운데 상당수를 품고 있다. 러시아 회화만이 지닌 고유한 정취를 느끼려면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지은이의 눈길이 오래 머무는 곳도 이 두 미술관이다.

러시아 사실주의 역사화를 대표하는 바실리 수리코프의 1887년 작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러시아 사실주의 역사화를 대표하는 바실리 수리코프의 1887년 작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지은이의 설명을 빌리면 러시아 회화는 문학적 특성이 강하다. 그림의 형식 못지않게 내용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뜻이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이야기가 화면 전체를 가로지른다. 러시아 회화의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파가 1871년 결성돼 50년이나 지속된 ‘이동파’다. 이동파라는 이름은 참여 화가들이 수도를 떠나 지방 도시를 돌며 전시회를 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변방의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려 한 이 화가들의 노력은 현실에 눈을 돌려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기도 했다. 이들의 의지는 역사화라는 장르에서 탐스런 결실을 얻었는데, 그 미적 성취를 보여주는 한 경우가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의 작품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1887)다.

트레티야코프·러시아미술관으로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17세기 러시아 정교의 대분열이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권을 확장하려 러시아 교회 전례를 뒤바꾸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다. 교권 확장은 러시아 정교의 우두머리인 차르의 중압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반대파에는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이 포함돼 있었다. 차르 중심의 신교도와 귀족 중심의 구교도는 끝까지 맞섰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2만명의 구교도가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구교도의 반차르 저항 정신은 이후 수백년 동안 도도히 흐를 반역의 저류가 됐다.

러시아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 일랴 레핀의 <어느 선동가의 체포>(1880~1889).두 작품의 배경은 200여년의 차이가 나지만 차르 체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두 주인공의 강렬한 눈빛은 겹친다.
러시아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 일랴 레핀의 <어느 선동가의 체포>(1880~1889).두 작품의 배경은 200여년의 차이가 나지만 차르 체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두 주인공의 강렬한 눈빛은 겹친다.
‘대귀족 부인…’ 장대한 아름다움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이 반대파의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수리코프와 함께 이동파를 대표했던 화가 일랴 레핀(1844~1930)은 더 적극적으로 현실을 역사화 속에 담았다. 그의 작품 <어느 선동가의 체포>(1880~1889)는 1877년 열린 ‘193인 재판’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귀족층·지주층의 자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인민 봉기와 차르 전복을 기도했던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운동은 러시아 혁명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1970년대에 정점에 이른 이들의 활동은 대대적 체포와 ‘193인 재판’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이후 혁명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레핀의 그림은 이 시기에 체포된 젊은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상기된 얼굴의 운동가는 결코 비굴하게 선처를 호소하거나 절망하여 좌절할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상 언젠가 이 수고와 희생의 결실을 보릭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 열정과 믿음으로 부릅 뜬 눈은 200년 전 차르에 대항했던 구교도 여성 귀족의 눈과 겹친다. 그렇게 러시아 미술에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흐른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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