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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유토피아라는 성배 포기 말라

등록 2007-01-11 20:56

<미완의 시대-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이희재 옮김, 민음사 펴냄·2만5000원
<미완의 시대-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이희재 옮김, 민음사 펴냄·2만5000원
공산주의적 열정으로 살아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홉스봄
‘극단의 시대’에 20세기의 역사 기록했다면
‘미완의 시대’는 그 뒷면인 개인 실존의 삶 기록한 회고록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나”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묘사한 건 적실했다. 인류 역사상 그토록 광범위한 정치적 실험이 진행된 적도 달리 없었고 그토록 파멸적인 침략과 전쟁이 벌어진 적도 달리 없었다. 20세기는 ‘극단’이란 말 말고 다른 어떤 말로도 규정하기 어렵다. 홉스봄은 그 20세기를 통째로 산 사람이다. <극단의 시대>는 역사의 격류 한가운데서 그 자신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휩쓸리고 표류했던 한 세기에 대한 관찰이자 기록이고 반성이었다.

2002년에 출간한 <미완의 시대>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극단의 시대>의 뒷면”이다. <극단의 시대>가 객관적 엄밀성이라는 학문의 요구에 맞춘 역사학 저서인 데 반해, <미완의 시대>는 한 개인의 실존적 삶을 통해 동일한 시대를 이야기하는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일어난 일을 밖에서 기록하는 것이고 회고록은 일어난 일을 안에서 기록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이 자서전의 윤곽을 그려준다.

지은이는 자신이 산 20세기를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한 세기”라고 말한다. 그 예외적인 시대의 사건들은 지은이의 개인사를 처음부터 규정했다. 1917년 그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세계사적 격량의 직접적 결과였다. 영국인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이 어머니가 만나 결혼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때 두 사람의 조국은 세계대전에서 맞붙은 적대국이었다. 양쪽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둥지를 틀었고, 1차대전이 끝난 뒤 두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신부 쪽 고향인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들어왔다. 장사를 해서 돈이 좀 있었던 홉스봄의 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이삿짐을 풀었지만, 금세 전후 유럽의 가혹한 시련에 휘말려들었다. 돈은 곧 떨어졌고, 가족은 부르주아 계층의 위기와 몰락이라는 일반적 상황을 피해가지 못했다.

1929년 돈을 구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아버지는 2월의 찬바람 부는 밤에 집앞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12살 홉스봄은 아버지를 잃었다. 집안의 버팀목이 무너지자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일차대전 적국 출신인 부모

얼마 뒤 어머니마저 피를 토했다. 폐병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접고 어머니는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했다. 1931년 여름 어머니도 끝내 세상을 등졌다. 14살 소년은 고아가 됐다. 자서전 안에서 이제 노인이 된 지은이는 일찍 떠난 어머니를 하염없이 그리워한다. “어머니가 몸져 누워 있는 동안 나는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또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어지간히 신경을 썼다. 어머니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새겨들었다.”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도 반듯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긍심이 강하고 정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책으로 얼굴을 가린 에릭 홉스봄. 홉스봄은 어려서 외모 콤플렉스가 작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서전 안에서도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한다. 외모에 대한 보상 욕구로 독서와 음악에 깊이 빠져 들었음을 암시하는 구절도 나온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책으로 얼굴을 가린 에릭 홉스봄. 홉스봄은 어려서 외모 콤플렉스가 작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서전 안에서도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한다. 외모에 대한 보상 욕구로 독서와 음악에 깊이 빠져 들었음을 암시하는 구절도 나온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부모 없는 소년 홉스봄은 삼촌이 살던 베를린으로 간다. 거기서 그는 또다시 20세기적 사건에 맞부딪친다. 나치(국가사회주의)의 ‘민족혁명’이 독일을 삼킬 듯 으르렁거렸고 반대쪽에서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외쳤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양 세력에 끼여 최후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유대인 피를 이어받은 데다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영국인의 정체성을 지녔던 홉스봄은 나치즘에 눈 돌릴 이유가 없었고, 허약하고 무력한 사회민주당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남은 것은 공산당뿐이었다. 15살 김나지움 학생은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고 스스로 공산주의자를 자처했다. 독일 공산당 계열의 사회주의학생동맹에 가입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상황은 파국적이었다. “우리는 타니태닉 호에 타고 있었다. 배가 조만간 빙산에 부딪힐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지은이는 자신이 정치운동에 투신한 이유를 긴박한 시대 분위기에서 찾는다. 혁명 활동에 참여할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아이는 인간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세상사에 유난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아이 같았다.” 그는 호기심과 탐구열이 남달랐지만, 그 욕구를 충족시킬 일차적 대상은 독서였지 현실이 아니었다. 시대가 그를 현실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청소년기의 사회주의 운동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끝나고 홉스봄은 1933년 4월 아버지의 나라로 떠밀리듯 건너간다. 그는 3년 뒤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하고, 16살 이래 목표가 된 역사학을 전공한다. 대학 신입생 때 자신의 이념에 따라 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이후 50여년 동안 변치 않는 신념으로 공산당원 신분을 지킨다.


청소년기부터 공산주의자 자처

그러나 그가 그렇게 생애의 대부분을 바쳤던 공산주의 이념은 스탈린주의로 결정적 왜곡을 겪었고 20세기가 끝나기 전 파산하고 말았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그 자신의 삶을 떠받치던 축 하나가 무너진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너진 꿈도 꿈이다. 그 꿈이 왜 그를 그토록 사로잡았던가. 뜨겁게 달아오른 대중 시위에서 느끼던 개인과 집단의 일체감, 일종의 집단적 황홀경을 그는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적 체계가 주는 미학적 매력”은 마르크스주의 이념만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유토피아적 전망과 “속물 근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지적 혐오감”도 공산주의에 빨려든 이유였다고 그는 말한다.

현실에서 거부당한 공산주의적 열정과 희망을 그는 여전히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 여긴다.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아더왕 이야기’의 한 구절을 앞세운 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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