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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바다에서 건져올린 싱싱한 에로티시즘

등록 2007-02-15 17:35수정 2007-02-15 18:15

<키조개> 한승원 지음. 문이당 펴냄. 9800원
<키조개> 한승원 지음. 문이당 펴냄. 9800원
쉰한살의 매력적인 과부이자 자궁권력자인 허소라
주변 남성들과 아슬아슬한 욕망의 줄다리기 즐기면서
그로부터 청죽같은 소설 한편 얻어내려 해
조개·연꽃·바다·자궁 등의 상징 통해 생명에 대한 성찰
고향인 전남 장흥 바닷가에 ‘해산토굴’이라는 집필실을 마련해 놓고 글을 쓰는 작가 한승원(68·사진)씨가 또 하나의 장편 <키조개>(문이당)를 펴냈다. 지난해 5월 세 권짜리 소설 <원효>를 낸 지 불과 반 년 남짓 만이다. <원효>에 앞서 2005년 3월에는 역시 한 권짜리 장편 <흑산도 하늘길>을 내놓은 바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쓰는 틈틈이 쓴 산문을 모아 <차 한잔의 깨달음>(2006년 12월)과 <이 세상을 다녀가는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2005년 11월) 등의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이 땅의 작가들이 쓴 소설책 시장이 썰렁해진다고 야단인 이 판국에, 너희 모두를 소설가가 되게 한 단초를 제공한 이 아비가, 너희로 하여금 ‘아이고, 아버지 금년에도 또 소설책 한 권 내셨네’ 하고 놀라게 하는 까닭이 이 소설 속에 들어 있을 터이다.”

소설가 한강씨와 한동림씨의 부친이기도 한 작가가 ‘작가의 말’에 쓴 글이다. 작가는 아울러 “소설은 한사코 재미있게 쓰지 않으면 독자가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소설가는 이렇게 소설 쓰기에만 미친 듯 전념해야 한다는 전범을 보이겠다는 것” 등의 각오를 밝혔다.

소설 <키조개>에는 작가 자신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소설 앞머리에는 그의 집필실 현판을 본 한 스님이 “한 선생님은 날마다 해산(解産)을 하겠구먼요”라는 덕담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스님의 말마따나 해산토굴에 입주한 뒤, 그렇잖아도 바지런했던 작가의 생산성은 한결 높아진 듯하다.

작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 역시 글을 쓰는, 쉰한 살의 매력적인 과부 ‘허소라’가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다. 작가의 이웃으로 이사 온 허소라는 늦은 나이에도 여전히 달거리를 하는 왕성한 생명력의 소유자이자 주변 남성들을 미혹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요부형 인물이다.

작가가 관찰한바 허소라는 ‘헤픈 푸짐’을 특징으로 삼는 ‘자궁 권력자’이다. 소라의 이름이 조개의 일종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작가의 상징 체계에서 조개와 연꽃, 바다와 자궁은 모두 동의어에 해당한다. 형태상의 유사성과 함께 그것들은 매혹과 생산성을 공유한다. 또 하나, 그것들은 위태롭다. 자칫하다가는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최고 윤리는 물의 성질”

“평생 동안 나는 늘 자궁의 권력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면서 살아왔다. 교미를 하고 난 암컷 사마귀가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는 장면을 늘 생각한다. 나에게는 물 무섬증이 있다. 우주를 낳은 자궁의 가장 확실한 모습은 바닷물이다. 이 세상 최고의 윤리는 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14~5쪽)

<키조개>의 저자 한승원씨
<키조개>의 저자 한승원씨
수컷 사마귀가 미구에 닥칠 파멸에도 아랑곳없이 암컷 사마귀를 탐하듯, 허소라의 주변에는 그의 자궁을 노린 수컷들이 끊임없이 출몰한다. 홀아비 변호사 이계두, 죽은 쌍둥이 여동생의 남편 박남철, 평생 그를 짝사랑해 온 순박한 어민 영후, 그리고 그의 노총각 동생 영재까지. 허소라는 그들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욕망의 줄다리기를 즐기는 한편 그로부터 청죽 같은 소설 한 편을 얻고자 한다.

“여자의 여근 자체가 하나의 운명적인 허방이다. 그것을 이용하여 성을 즐기곤 하는 남녀 모두, 그것이 환혹의 허방인 줄 알면서도 빠져 허우적거리며 자기의 새 길을 찾기도 하고 오던 길을 잃기도 한다.”(141쪽)

초기작인 장편 <포구>와 소설집 <안개 바다> 등에서부터 바다는 한승원 소설의 무궁한 생산성을 보장해 주는 자궁과도 같은 존재였다. 소설 <키조개>에서 바다 조개와 연꽃, 그리고 주인공 허소라의 여근은 같은 모양인 것으로 그려진다.

“바다 조개와 연꽃은 서로 비슷하다. 횟집 수족관 유리벽에 기대서 있는 비둘기색 키조개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껍데기 두 짝을 반쯤 벌린 키조개 속에는 달걀 노른자위 색깔의 꽃봉오리 같은 속살이 빙그레 웃는 듯 입을 벙긋 벌리고 있고, 그 가장자리에는 무늬 고운 레이스가 둘려 있는데, 그것이 천천히 너울거리고 있었다.”(202쪽)

난자 채취 실험 비판하기도

“소라 양, 축하합니다. 20년 가까이 많은 여성들을 대해 왔지만, 소라 양처럼 꽃잎이 겹으로 되어 있고, 그 바깥쪽 꽃잎 무늬가 그렇듯 예쁘고 아름답고 섬세한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이야기로만 들어 온, 우리 인간 꽃잎의 가장 아름다운 원형을 처음 대했습니다.”(203쪽)

뒤엣것은 아직 어린 허소라가 자신의 여근 생김새가 부끄러운 나머지 어머니와 함께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을 때 여의사에게 들은 말이다. 조개와 연꽃과 바다와 자궁을 동일시하는 작가의 상징 체계는 자연스럽게 토속적 에로티시즘으로 나아간다. ‘자궁 권력자’ 허소라는 뭇 수컷들 가운데에서 결국 순박한 잠수부 영후를 택하며, 두 사람은 키조개 축제 전야제가 열리는 밤 영후의 배에 타고 바다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영후가 조개를 잡고자 잠수복을 입고 바다로 내려가는 장면의 묘사는 이러하다.

“저 영후의 몸뚱이가 남근이라면, 이 바다는 천관보살의 여근이다. 아니, 잠수복 입은 영후의 몸뚱이는 한 마리의 정자다. 투구에 달린 공기 주입 호스는 정자의 꼬리이다.”(242쪽)

“그녀는 마치 자신의 자궁 속으로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들어오고 있는 듯싶어 진저리를 쳤다.”(243쪽)

소설 앞부분에서 해산토굴 집필실로 허소라의 방문을 받으면서 독자에게 허소라를 소개하는 구실을 하고는 한동안 사라졌던 작가는 뒷부분에서 다시 허소라와 마주 앉는다. 두 사람은 각자 꿈에서 목격한 지옥의 형상과 그곳으로 끌려 온 인간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지옥의 모습이 여근을 닮았다는 점, 그리고 의학 실험을 이유로 함부로 난자를 채취한 자들이 지옥 손님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역시 소설 앞부분에는 작가의 집필실 메모판에 적힌 ‘곡신(谷神)=갯벌=연꽃=키조개’라는 등식이 등장한다. <키조개>가 진행되는 동안 작가는 그 등식과 관련한 작품을 따로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소설 <키조개>야말로 메모판의 바로 그 공식에서 빚어져 나온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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