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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카고학파’ 세계 권좌 이렇게 올랐다

등록 2007-02-22 20:19

<궁정전투의 국제화> 이브 드잘레이·브라이언트 가스 지음. 김성현 옮김.그린비 펴냄·2만원
<궁정전투의 국제화> 이브 드잘레이·브라이언트 가스 지음. 김성현 옮김.그린비 펴냄·2만원
케인스학파에 밀리자 국외 인재 끌어들여 후학 배출
신자유주의 전파자로 양성된 칠레 경제학자들 ‘시카고 보이스’
‘미국 유학’ ‘전문지식’이라는 무형 자본으로 자국 권력 장악
중심부 국가 지식수출이 끼친 권력관계 파헤쳐
‘시카고 보이스’는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파가 길러낸 칠레의 경제학자들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이들이 유명해진 계기는 피노체트 쿠데타였다.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과거의 권력 중심에 포진해 있던 엘리트 세력을 추방·살해하고 시카고 유학파 경제학자들을 등용했다. 군사력을 앞세운 군부세력과 미국식 경제학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신진 엘리트는 동맹관계를 구축했다. 시카고 보이스는 ‘학문의 모국’에서 배운 대로 칠레 경제를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재편했다. ‘미국 유학’과 ‘전문 지식’이라는 무형의 자본은 이들에게 국가권력의 중추를 담당할 기회를 제공했다. 옛 엘리트를 몰아내고 새 엘리트가 들어앉는 권력변동의 과정은 지식을 무기로 삼은 권력투쟁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시카고 보이스를 낳은 시카고학파의 탄생과 진화는 학문 세계 내부의 권력투쟁을 좀더 고전적인 방식으로 알려준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카고대학 경제학과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학문적 열세를 면치 못했다.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이른바 ‘아이비리그’의 케인스주의가 국가의 경제정책을 좌우하던 때에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들은 통화주의라는 이름의 반케인스주의 이론을 개발해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다. 경제학계의 영토를 두고 새로운 무기로 전쟁을 벌인 셈인데, 강력한 적을 공략하지 못한 시카고학파는 국외로 눈을 돌려 인재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시카고 보이스는 시카고학파의 국제전략이 산출한 대표적 후학 집단이었다. 외부에서 자원을 동원한 시카고학파는 1980년대 신보수주의 정권의 수립과 함께 케인스주의자들을 제압하고 학문권력을 장악했다.

<궁정전투의 국제화>는 국가권력을 둘러싼 지식투쟁의 양상을 국제적 차원에서 조명한 책이다. 시카고학파의 형성과 시카고 보이스의 출현 과정은 그 투쟁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다. 지은이인 프랑스 사회학자 이브 드잘레이와 공저자인 미국의 법학자 브라이언트 가스는 라틴아메리카 네 나라 칠레·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를 사례로 삼아 지식의 수출과 수입이 각 나라의 국가권력의 변동과 맺는 관계, 특히 중심부 국가의 지식이 주변부 국가의 권력 구성에 끼치는 영향을 규명하고 있다. 지은이들은 이 과제를 단순히 이론적 차원에서만 살피지 않고, 관련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면접 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다. 이들이 만난 주요 인사는 라틴아메리카의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수백명에 이른다.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을 전복한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왼쪽)와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파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 프리드먼이 키운 칠레 출신 경제학자 집단 ‘시카고 보이스’는 피노체트 정권에서 옛 엘리트 집단을 제치고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진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을 전복한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왼쪽)와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파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 프리드먼이 키운 칠레 출신 경제학자 집단 ‘시카고 보이스’는 피노체트 정권에서 옛 엘리트 집단을 제치고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진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들이 말하는 ‘궁정전투’란 전문 지식인들이 국가권력의 한 축을 장악하려고 벌이는 권력투쟁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궁정 내부에서 권력을 놓고 벌이던 귀족들의 정치투쟁과 유사하다. 지배집단 내부의 우위를 점한 세력과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인 세력의 경쟁을 국제적 차원에서 조명한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책의 분석을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적 지배계층은 법률 지식을 독점한 법률가들이었다. 법률적 전문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고 자본이었다. 1970년대를 거치며 법률 전문가들은 경제 전문가들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경제학이 학문자본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것인데, 시카고 보이스는 이들을 대표한다.

‘궁정전투’란 지식인의 권력투쟁

전문 지식은 국제 지식 시장을 통해 유통된다. 유통의 루트를 장악한 것은 헤게모니 국가, 곧 국제사회의 중심국가인 미국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이 누렸던 학문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2차대전 이후 미국이 획득했다. 시카고 경제학파의 국제전략이 보여주듯이, 미국은 지배적 학문을 주변부 국가에 수출하고, 주변부 국가의 지식 엘리트는 중심부 국가의 학문을 수입해 권력경쟁에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중심부 국가 내부에서 벌어진 학문적 갈등도 주변부 국가에 함께 수출되며, 갈등의 수출은 학문권력을 둘러싼 투쟁 전략의 수출도 동반한다. 주변부 국가는 지식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식계의 갈등과 전략까지 인수하는 것이다. 이 수출·수입 관계는 아르헨티나의 페소화가 미국의 달러화에 연동되듯이 일종의 연동현상을 일으킨다. 중심국의 지식이 변동하면 그에 맞추어 주변국 지식인의 학문적 입장이 뒤따라 바뀌게 되는 것이다.

지은이들은 이런 현상이 지배권력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저항세력 안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발견된다. 억압적 정치권력에 반대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하는 지식인들도 중심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권운동이나 시민운동은 또다른 형태의 상징자본을 축적하는 계기로 활용된다. 상징자본을 충분히 확보한 지식인들은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다. 이 새로운 지식권력은 주로 인권법에 기댄 법률가들이다. 인권담론은 권력 투쟁의 수단이 되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바뀐다.

지은이들이 이런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동원한 논리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창안한 것들이다. 지식을 자본으로 이해하는 것부터가 부르디외의 성과다. 특수한 지식이 보편적 지식의 지위를 획득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도 부르디외적 발상의 연장선에 있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통찰은 이 책의 논리를 구성하는 핵심 방법론인 셈이다.

주변국 ‘지식 중심국’ 따라 출렁

이 책의 본문은 라틴아메리카 네 나라의 경우로 사례를 한정하고 있지만, 지은이 드잘레이가 새로 쓴 한국어판 서문은 본문의 분석이 아시아에서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카고 보이스가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 아래서는 ‘버클리 마피아’로 바뀌었다는 점이 다를 뿐 본질적 과정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심국 미국에서 가져온 전문지식을 중개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이득으로 자본을 불리고 다시 그 자본으로 권력을 확보하는 그 메커니즘은 한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상에서 통상·경제 관료들이 경제학적 지식으로 우월한 지위에 올라선 뒤 국민과는 상관없이 협상을 좌우하는 현실은 이 책의 한국적 활용 가능성을 가늠케 해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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