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낯설다 / 티모시 윌슨 지음·진성록 옮김 부글북스 펴냄·1만3800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주인공 안토니오는 이렇게 탄식한다.
“진실로 말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왜 이렇게 슬픈지 이유를 모른다. 갑갑해서 미치겠다. 내가 왜 그렇게 슬픈지, 원인이 무엇인지, 어디서 생겨났는지 도대체 모르겠어…. 아직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
이 독백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한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그 때문에 삶의 길에서 실족하는지 엿보게 해준다. 자기에 대한 올바른 앎, 곧 자기 지식은 더 낳은 삶을 살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다. 참선이나 요가, 종교적 성찰, 학문적 탐구는 자기 지식의 길을 밝혀주는 것들 가운데 몇 가지다. 심리학 공부도 자기 지식의 길을 안내해주는 유효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미국 버지니아대학 교수)이 쓴 <나는 내가 낯설다>는 자기 지식이라는 심리학 주제를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이 말하는 ‘자기 지식’의 대상은 ‘무의식’이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나, 곧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의 드넓은 영토에서 의식이 차지하는 부분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심리학은 말한다. 나머지 대부분은 의식되지 않은 채로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내가 모르는 ‘나’가 나를 움직인다는 것, 이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자기 지식의 목표라 할 수 있다.
비행기 자동항법장치처럼 작동하는 ‘적응 무의식’
효율적으로 세상 살아가도록 자신도 모르는 새 작용
“자기관찰·노력 통해 무의식도 바꿔나갈 수 있다”
‘자기 지식’ 심리학 주제를 비전공자에게 쉽게 설명
이 책이 설정하는 무의식의 성격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린 무의식과는 성격이 다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불온하고 불쾌하고 불길한 원초적 충동 또는 기억이다.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선 안 될 이 심리적 퇴적물들은 마음의 가장 깊은 층위에 묻혀 봉인된다. 이 세계는 어둠의 세계이며 통상의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다. 윌슨이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보다 덜 부정적이다.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의 경우와 같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하고도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사뭇 다르다. 비유로 말하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정신이라는 가족 중에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이며, 윌슨이 말하는 무의식은 그 어린아이를 잘 관리하도록 채용된 보모이다.
프로이트 부정적 무의식과는 달라
지은이는 그런 무의식을 가리켜 ‘적응 무의식’이라고 지칭한다.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세계에 더 잘 적응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축적한 결과가 이 적응 무의식이다. 적응 무의식은 말하자면, 제트비행기의 자동항법장치와 유사하다. 조종사가 의식적으로 기계를 작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항로를 찾아가도록 해준다. “적응 무의식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파악하고, 위험에 대해 경고음을 내고, 목표를 설정하고, 세련되고 효율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하는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한다.” 적응 무의식의 도움이 없다면 삶의 99%가 난관에 봉착한다. 적응 무의식은 억압 때문에 의식 바깥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효율성 때문에, 다시 말해 지각되지 않아야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무의식의 영역에 머무른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판단하고 예측하고 반응하는 즉각적 정신작용은 대부분 적응 무의식의 도움을 받아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지은이는 적응 무의식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고 말한다. 하나가 쾌락성이며 다른 하나가 정확성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내가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정보를 고르고 해석하고 평가하라’는 명령을 따름과 동시에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라’는 명령을 따른다. 문제는 이 두 원칙이 자주 불일치하고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자아가 겪는 내면의 전쟁은 이 두 원칙 사이에서 벌어진다. 쾌락 원칙에 휩쓸릴 경우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적응 무의식이 지닌 또 다른 문제는 익숙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해석하는 경향에 있다. 그런 습관성은 편견이라는 폐해를 낳는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남·녀에 대한 편견은 의식적으로는 스스로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무의식 속에서 계속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신속하게 사태를 판단하려는 적응 무의식은 기존의 정보에 기대어 새로운 정보를 분별하고 선택한다. “적응 무의식이 급히 결론에 이르고, 정반대의 증거가 나와도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으려 드는 경향에서,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 몇 가지의 원인을 찾아도 결고 무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의식의 차원이 아닌, 무의식의 차원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이런 불일치를 보여주는 사례가 ‘동성애 공포증’이다. 동성애에 대해 혐오감이나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이 동성애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보다 더 동성애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 실험으로 입증됐음을 이 책은 전한다. 동성애 성향을 지닌 사람이 의식적으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동형성’이다.
동성애 성향 강할수록 되레 혐오
무의식의 세계 대부분은 의식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무의식 가운데 일부는 알려고 노력하면 의식의 차원으로 불러들일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 무의식의 부작용 또는 부산물을 줄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것이 말하자면 자기 지식이다. 이 자기 지식에 이르는 길로 지은이가 제시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 관찰이다. “자신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관찰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무의식을 바꿔나갈 수도 있다. 훌륭한 역할 모델을 설정하고 끊임없이 그 모델을 따라 배우려 하다 보면 실제로 그 사람처럼 될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가 흉내를 내려고 노력하는 그 존재가 된다”라는 커트 보네거트의 말을 인용한다.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사람도 끊임없이 외향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외향적인 사람이 된다고 지은이는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작은 걸음이 큰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그 사람처럼 행동할 능력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효율적으로 세상 살아가도록 자신도 모르는 새 작용
“자기관찰·노력 통해 무의식도 바꿔나갈 수 있다”
‘자기 지식’ 심리학 주제를 비전공자에게 쉽게 설명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가 그린 <나르키소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자기애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지만, 디모시 윌슨은 <나는 내가 낯설다>에서 내가 모르는 나의 무의식을 바로 보고 그 무의식을 활용하면 더 나은 나, 더 나은 삶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