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안형주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 2만2000원
1909년 미국 네브라스카에 세워진 한인소년병학교는 해외 최초의 무관학교다. 2년 뒤 이회영이 서간도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교재와 교과내용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왜 하필이면 네브라스카인가. 이방인에 대한 선교 의지가 강했던 백인들이 많았던 탓이 크다. 이 학교에 부지를 제공한 헤이스팅스 대학의 주목적도 전도였다. 박용만과 의형제였던 이승만은 헤이스팅스를 찾은 뒤 매일 세차례 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일본과 군사적으로 싸운다는 것은 망상이라고 비판했다. 이 학교 출신들은 한국 초대 대통령과 노선이 달랐다는 이유로 해방 뒤 일시 귀국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름 군사캠프 성격의 이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장 더운 오후 3시에 군사훈련을 받고, 매일 아침 농장에서 5시간씩 일을 해 정규 학교의 학비를 마련했다. 학교가 미래 독립군의 양성소이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생존의 도구였던 셈이다. 학생들 대부분은 정규 학기중에는 백인 가정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숙식과 학비를 해결했던 ‘스쿨보이’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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