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박영근 지. 창비 펴냄. 7000원
영원한 사십대로 남은 노동자 시인 박영근 세상뜬 지 1년
지상의 벗들이 그의 시편 수습해 유고집 펴내
부패한 현실, 무능한 운동·언어에 대한 환멸 등지고
별로 돋아나 ‘모든 길들 지워진 캄캄 암흑’ 비추다
지상의 벗들이 그의 시편 수습해 유고집 펴내
부패한 현실, 무능한 운동·언어에 대한 환멸 등지고
별로 돋아나 ‘모든 길들 지워진 캄캄 암흑’ 비추다
어느새 1년. 노동자 시인 박영근(1958~2006)이 세상을 뜬 지 오늘로 꼭 1년이 되었다. 살아 있었다면 문단 안팎의 저 숱한 ‘58 개띠’들과 더불어 세는 나이 쉰을 헤아리며 하마 멋쩍게 웃고 있었을 그는 그러나 쉰의 문턱에서 서둘러 세상을 버리고 영원한 사십대로 남았다. 그리고, 속절없이 한 살씩의 나이를 더 먹은 지상의 벗들은 그가 여기저기 떨구고 간 시편들을 수습해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를 묶어 냈다.
“사람이 지어내는 한 점 슬픔도 없이/ 이제 별이 돋아나리라/ 모든 길들이 지워진/ 캄캄 암흑에/ 나 별자리에 누워 환히 흘러가리라”(<몽골 초원에서 2> 부분)
시인이 몽골에서 열린 ‘한·몽 시인대회’에 참가하느라 생애 최초로 외국 땅을 밟은 것이 2003년 8월이었다. 시집 앞쪽에는 당시 몽골 초원에서 팔베개를 한 채 편안하게 누운 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화보로 실려 있거니와, 당시 몽골 여행의 체험이 퍽 강렬했던지 시인은 <몽골 초원에서>라는 제목의 시를 네 편이나 남겼다.
“여기서 나의 말(言)은 풀 한포기 흔들지 못한다/ 헤매는 길이 어디쯤인지 나는 모른다/ 쑥향기 속에 잠시 몸을 눕힐 수 있을 뿐/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풀을 찾아 구름을 넘는 양떼를 따라갈 뿐이다// 이제 너를 돌아보지 마라/ 다비(茶毘)/ 다비/ 돌아갈 곳을 찾던 슬픈 마음이/ 불꽃 한 점 없이 저를 사르고/ 까마득한 허공의 새들을 부른다”(<몽골 초원에서 3> 부분)
몽골의 광활한 초원에서 일상의 자질구레한 욕망을 여의고 잠시나마 영원의 감각을 맛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곳이 시인이 경험한 첫 해외 여행지였음에랴. 그렇다고는 해도 ‘다비’니 ‘까마득한 허공’이니 하는 말들은 왠지 불길하게 들린다. 그의 죽음은 물론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런 질병이 고황의 경지에 들도록 시인 자신이 방치한 정황이 포착되는 까닭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현실, 무능한 운동과 무기력한 언어에 대한 환멸 때문에 그가 스스로 삶을 놓아 버린 것은 아니겠는지.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사
“다 지나간 일이라고 가판대의 신문들이/ 늙은 배우처럼 웃고 있습니다/ 지상의 휴대폰들이 환하게 켜지고/ 새떼들이 일제히 날아갑니다/ 나는 여전히 번지 미상의 길거리에서/ 노래의 후렴을 듣습니다/(…)/ 사방은 다시 어두워지고”(<자술서> 부분)
80년대 노동시의 한 상징으로서 일과 삶과 말의 일치를 꾀했던 그에게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변모는 자못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환멸은 사회의 변화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어서, “TV 앞에서 넋을 빼고 앉아 있는/ 시의 몽매한 얼굴”(<임시묘지의 시>), 또는 “화려한 수사가 가리고 있는 현실의 비참과 말의 무기력함”(같은 시의 ‘시작 메모’) 역시 이 순정한 노동자 시인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래서 “나만 남아/ 어둠으로 남아”(<탑>) “어디쯤에서 나는 그대와 헤어졌는가”(<몽골 초원에서 2>) 자문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안다, 빈방의 허기와/ 욕정과 구겨진/ 원고지와 바람벽에/ 지친 형광등 불빛에 말라비틀어져/ 툭 떨어지는/ 꽃대가리, 결핍은/ 견딜 수 없는 비등점에서/ 주검으로 타버리는 것”(<결핍> 부분)
“내가 살고 있는 낡은 집 한 채/ 마당귀의 토마토 두 그루/ 여자 하나이 꽃대를 세우고/ 흙살을 돋우고 있다// 나는 빗소리를 열고/ 그 푸른 줄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낡은 집> 부분)
이 두 시를 비롯해 시집의 시 대부분이 작성된 것은 시인이 말년의 12년 동안(1993~2005) 거주한 부평의 남향 집이다. “공단 마을의 단칸방들과 골목을 떠돌다/ 처음으로 대문 밖을 향하여 이름을 내걸며 웃던,/ 인천시 부평구 부평4동 10의 22번지”(<낡은 집>) 그 집은, 위에 인용한 두 시에서 보듯, 시인의 극심한 환멸과 안간힘의 희망을 아울러 목격한 곳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이성복 시 <남해금산>)를 떠오르게 하는 신화적 세팅이 인상적인 <낡은 집>의 다짐은 어딘지 불안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하긴 <남해금산>의 사랑하는 여자 역시 결국은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가지 않았겠는가. 박영근의 시집에서 우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내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돌아가고 싶다고/ 오래 나를 흔들고 있다// 한밤중인데 문밖에선 비 떨어지는 소리// 아직도 그곳에서는 봄이면 사람들이 밭을 갈고/ 논물에 비쳐드는 노을의 한때를/ 흥건하게 웃고 있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돌아갈 저녁 불빛이 있는가// 종소리/ 시간의 먼 집으로 돌아가는/ 종소리”(<슬픈 눈빛> 부분)
울음과 웃음, 생략된 (이곳)과 ‘그곳’, 혼자인 ‘나’와 여럿인 부모형제들 사이의 대립이 슬픔을 한껏 고조시킨다. “아직도(…)돌아갈 저녁 불빛이 있는가”라는 의문형은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의 부질없음을 아프게 환기시킨다. 그렇다.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이다.
고인의 벗들만 남아 ‘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시인은 같은 인천의 용현동으로 ‘이사’한다. 죽기 불과 반년 전이었다. 그런데 이사한 뒤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낡은 집’을 향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낡은 집은 시인의 후반 생의 근거지이자 시인 자신의 가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이사> 앞부분)
아니다. 용현동으로 거처를 옮길 때 시인은 이미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사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환멸뿐인 현실, 곧 이승이란 이미 스러진 절터에 지나지 않았던 것, 빛은 오히려 어둠(죽음) 쪽에 있었던 것.
“돌아가고 싶었다/ 이 폐사지를 건너/ 뜨거운 해와 바람과 물소리마저 사라진 뒤/ 밝아올 어둠의 자리”(<폐사지에서 1> 부분)
고인의 벗들은 오늘 저녁 7시 30분 인천 주안 컬쳐팩토리 극장에서 유고집 출판 기념을 겸한 1주기 추모 행사를 마련한다. 저승으로 이사간 그의 ‘집들이’인 셈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고형렬 시인
밝아올 어둠의 자리 하늘에 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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