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18년 접는 김윤경 편집장
18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세상이 여러 번 바뀌었다. 한 자리에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면 그대로 ‘역사’가 된다. 계간 <역사비평>의 편집장 김윤경(44)씨는 이 잡지의 산 증인이다. 그가 오래 머물렀던 이 집을 이달 말로 떠난다. “그만 둔다고 하니까 다들 ‘청춘을 묻었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스물여섯 젊은이가 어느덧 중년 고개에 이르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역사비평>은 어떻게 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안살림을 도맡아 하던 <역사비평>의 주부였다. 주부가 집 나간다고 하니 가족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였다. 대학 영문과를 나와 출판사 편집자로 1년 남짓 일했던 그는 그때 중학교 교사였다. <역사비평> 창간호를 만든다기에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한동안 창간호 편집을 도운 것이 계기였다. 당시 편집주간 서중석(현 성균관대 교수)씨를 비롯해 역사비평사 사장 원혜영(현 국회의원)씨가 있었지만 편집 실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해 9월 창간호가 나온 뒤 스스로 제안해 <역사비평> 편집자로 들어앉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최근호가 딱 70호째였다. 이 성실한 살림꾼은 한 번도 결호를 내지 않았다.
“역사 연구를 대중화하고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창간 취지였어요. 상아탑에 갇힌 학문을 밖으로 끌어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널리 소통하겠다는 뜻이었는데, 제가 역사 전공이 아니었으니까 늘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그 뜻을 되새겼지요. 우리 사회와 역사를 알아간다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역사비평>이 한 일을 한마디로 줄이면, ‘역사 만들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일에 저도 작지만 한몫을 더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역사비평>은 창간호부터 우리 현대사를 바르게 복원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당시 제도권 학계의 역사 연구는 근대사 이전에 한정돼 있었고, 3·1운동 이후의 현대사는 역사로 치지도 않았다. <역사비평>은 그 말소된 기억을 되살려 해방 전후에서 4·19, 5·16, 심지어는 6월항쟁 같은 당대사까지 논의의 영역으로 삼았다. 김동춘·김재용·이종석·임지현·주진오씨 등 <역사비평> 편집위원 출신들은 그 사이 중견학자로 성장했다. 이들의 성장을 뒷받침했던 그도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99년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과정을 마쳤다.
“편집자로서 원칙이 있었다면, ‘내가 첫 번째 독자다’라는 명제였어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은 독자들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부실하거나 답답한 원고는 고치고 풀도록 했죠. 일반인과 소통하려면 우선은 잘 읽혀야 하니까요.”
편집자로서 그가 한 또다른 일은 기획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었다. “독자의 처지에서 알고 싶은 것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문학 속의 사회사’는 2000년에 시작돼 최근까지 10회가 이어진 성공적인 장기연재물이다. “가령, <흥부전>을 사회사의 시선으로 읽으면 조선후기 농민층의 분화가 드러납니다. 농민의 양극화가 ‘부자 놀부’와 ‘가난한 흥부’로 나타났다는 것이죠. <흥부전>을 꼼꼼히 분석해보니 놀부가 4000석 지기였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여러 잡지가 탄생하고 소멸했지만, <역사비평>은 여전히 꿋꿋이 제 길을 걷고 있다. 참을성 있게 뒷일을 감당해온 이 편집자의 덕이 컸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쌓은 역량으로 새 일을 해보려고 한다.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지난 18년 동안 여러 잡지가 탄생하고 소멸했지만, <역사비평>은 여전히 꿋꿋이 제 길을 걷고 있다. 참을성 있게 뒷일을 감당해온 이 편집자의 덕이 컸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쌓은 역량으로 새 일을 해보려고 한다.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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