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자유저술가, 〈알도와 떠도는 사원〉 저자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벌레이야기>를 통해서 본 ‘용서’의 의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요즈음 화제다.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 <밀양> 때문이다. 그 덕에 이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주로 신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에 대해서다. 그래서 부족한 공간이지만 이곳을 빌려 ‘나름의’ 답변을 하고자 한다.
<벌레이야기>는 아들의 유괴살해범을 용서하러 교도소에 간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여인이 교도소에 갔을 때, 범인은 매우 평안한 얼굴로 자기는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여인이 자기를 원망하거나 책벌해도 자기는 달게 받을 것이며 오히려 그러는 여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자 여인은 그 뻔뻔한 사내를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 사내를 용서한 신마저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참 딱한 이야기다.
기독교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종교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두면 큰 도움이 된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죄라는 말은 일종의 ‘동음이의어’다.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이 한 단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존재론적 죄’다. 이 죄는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아담이 처음 이 죄를 지었다. 그리고 이후 모든 인간이 그렇게 태어난다. 물론 상징이지만 그래서 ‘원죄’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죄는 일차적 죄이며 ‘단 한번’의 ‘신에게서 돌아섬’이다. 때문에 폴 틸리히는 이 죄는 ‘죄들’이라고 복수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도덕론적 죄’다. 이 죄는 신에게서 돌아선 인간이 그 결과로 짓는 악한 행위들이다. 그래서 이차적인 죄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 또는 법률적 죄가 모두 이에 속한다. 살인, 절도, 폭력, 사기, 시기, 탐욕 등등이다. 이 죄는 반복해서 저질러지고 또 반복적으로 책벌 또는 용서된다. 그래서 복수로 표현된다.
존재론적 죄는 오직 신과 관련되어 있고 그에 대한 책벌이나 용서도 역시 신의 몫이다. 책벌은 영혼의 죽음이고, 용서는 영혼의 재생이다. 책벌은 신과의 관계 단절이고, 용서는 신과의 관계 회복이다. 책벌로 ‘죄인’이 되고 용서로 ‘의인’이 된다. 책벌의 결과는 ‘악의 체험’이고, 용서의 결과는 ‘선의 체험’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인간을 용서하고 다시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 따라서 구원은 도덕론적 죄를 용서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존재론적인 죄를 용서해준다는 의미다.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칭의’라고도 한다.
반면에 도덕론적 죄는 오직 인간과 관련되어 있고 그 책벌이나 용서도 역시 인간의 몫이다. 책벌은 그 인간과의 관계 단절이고, 용서는 그 인간과의 관계 회복이다. 책벌은 ‘악인’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용서는 ‘선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책벌은 도덕적 또는 법률적 형벌을 주는 것이고, 용서는 그 형벌을 면해주는 것이다.
거칠지만, 죄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벌레이야기>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다. 여인이 자기 아이를 살해한 범인을 자기에 앞서 신이 먼저 용서해 주었다는 것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신이 만일 그의 죄를 용서해주었다면(내가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지만), 그것은 여인의 아이를 살해한 그의 도덕론적 죄를 용서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단지 그의 영혼을 구해주었다는 의미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만일 신이 범인의 법률적 죄를 용서했다면 전능한 능력으로 범인을 사형이라는 형벌에서 구해주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신에게는 신의 할일과 몫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할일과 몫이 따로 있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신의 주권적인 권리이자 절대적으로 감추어진 비밀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신의 구원에 대해 개입할 수도 없거니와, 또 알 수조차 없다. 신이 범인을 용서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설사 범인 자신은 그렇게 느꼈을지라도 말이다.
그럼 보자. <벌레이야기>에서 여인은 범인이 자기에게 저지른 도덕론적 죄를 용서할 권리와 기회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 딱한 것은 여인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또한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결과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권리마저 박탈당했다고 생각한 것이고, 절망하여 자살했다.
도덕론적 죄를 책벌하거나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 아니다. 오직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선택은 단지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혹시 우리도 여인과 같은 이유에서 절망하고 있지 않은가를. 혹시 누군가의 도덕론적 죄를 용서할 수 없어 그를 용서한 신을 원망하고 있지 않은가를. 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할 신성한 권리를 여전히 갖고 있다. 김용규/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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