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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주홍이 뱃속에 쥐가 자라고 있어요

등록 2007-06-22 19:41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십대의 임신과 낙태·죽음 다뤄
‘쥐’ 통해 사회의 인식 상징적 묘사
냉혹한 현실 들춰 따뜻한 해법 기대
<쥐를 잡자> 임태희 지음/푸른책들·8800원

‘쥐를 잡자’니? 곡식을 축내는 쥐를 박멸하자던 그 옛날 학창시절 추억담인가? 아니면 미스터리 추리소설? 그것도 아니면 한창 뜨던 오락프로그램 ‘여걸식스’의 그 쥐잡기 놀이? ‘제4회 푸른문학상’을 받은 청소년 소설이라는 설명과 책의 제목을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다.

‘갉작갉작갉작…….’ 이야기는 쥐소리에서 시작해 한참토록 쥐를 둘러싼 세 등장인물의 강박증만 묘사한다. 갓 부임한 고1 여학생반 담임 최 선생은 무단결석한 아이 ‘진주홍’의 사물함 안에서 쥐소리가 나는 것 같지만 직접 열어보지는 못한다. 결벽증이 심한 주홍의 엄마는, 집 냉장고 안에 쥐가 있다는 생각에 며칠째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주홍이 역시 자신의 배 안에서 쥐가 자라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한테도 말 못한 채 혼자 앓고 있다. 쥐는 과연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어느 날 반 아이들이 쥐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교실에서 주홍이는 쓰러지고 마침내 쥐의 실체가 밝혀진다. 주홍이는 ‘사고’로, 임신을 한 것이다. 엄마의 ‘쥐’도 드러나지만 여전히 냉장고 문을 열지 못한다. 엄마도 스무 살 때 아빠 없이 주홍이를 낳았던 것이다. 최 선생도 이제는 사물함에 쥐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문을 열어볼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어른들이 ‘미혼모’라는 쥐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사이, 주홍은 자신의 결정으로 임신 5개월에 낙태 수술을 하고 만다. 그럼에도 쥐는 없어지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엄마의 쥐였다는 사실에 절망한 주홍은, 어느 날 엄마 대신 냉장고를 열어 말끔히 청소를 하고는 외할머니댁으로 내려가 절벽 아래 폭포수로 몸을 던진다. 외할머니의 반대와 외면을 무릅쓰고 미혼모를 선택했던 엄마에게 “낳아주셔서 정말 고맙다”는 편지를 남긴 채.

청소년들의 결혼과 임신을 다룬 영화 <제니, 주노>의 한 장면.
청소년들의 결혼과 임신을 다룬 영화 <제니, 주노>의 한 장면.
아동학을 전공하고 어린이 책을 주로 써 온 작가 임태희씨가 이처럼 정면으로 ‘십대 미혼모’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지난해 이맘때 시멘트 바닥에 홀로 아기를 낳고 선명한 핏자국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 소녀”에 대한 텔레비전 뉴스의 충격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쓰고 보니” 슬픔과 분개만 담은 것 같아 원고를 다 버렸던 그는 그날 “쥐가 나타나 아수라장을 만드는 꿈”을 꾸고 난 뒤 다시 써냈다. 그렇게 생겨난 ‘쥐’는 물론 실제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홍이가 떠난 뒤 최 선생과 반 아이들이 열어본 사물함 안에는 뜻밖에도 고양이가 들어 있다.

시트콤 〈프렌즈〉의 레이첼, 〈섹스 앤 더 시티〉의 미란다 등 인기 ‘미드’ 속 싱글맘들에 자극받은 듯, 요즘 우리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당당한’ 미혼모들이 종종 등장한다. 한창 방영 중인 〈불량커플〉에서는 ‘결혼은 싫고 아이만 원해’ 우량 유전자를 지닌 남자를 유혹해 임신하는 주인공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다. ‘미혼모’라는 말이 등장한 1966년 이래로 4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미혼모들은 여전히 죄인처럼 숨어 살아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쥐’들이 태어나지도 못하거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버려지고 있다. 미혼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십대의 어린 엄마’들에게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홍이를 버려야 했다”는 작가의 고백은 현실적이다. 그렇지만 엄마나 주홍이의 ‘미혼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보니, ‘여성 3대의 비극’에 그쳐 버린 듯한 아쉬움도 크다. 칠레처럼 ‘여고생 미혼모’를 위해 탁아시설을 만든 학교까지 생기길 바랄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쥐’를 잡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희망은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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