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100>
남경태의 책 속 이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100> 만프레드 라이어 외 지음·신성림 옮김. 서강북스
올해로 서거 40주년을 맞은 남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의학도의 길을 계속 걸었다면 수백 명의 목숨은 살릴 수 있었겠지만 수백만 명을 해방시키는 혁명을 꿈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임스 프레이저가 아들을 기업가로 만들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소망을 거부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류학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황금 가지〉라는 걸작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게바라와 프레이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생각에서 그런 삶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의사와 기업가에 만족했다면 역사적 위인으로 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용성에 굴종한 인물은 언제나 당대의 쓰임새에만 부합할 뿐 통시대적인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은 분야가 문화이고 문화의 대표주자가 예술이다.
실용성을 숭배하는 현대 사회의 두드러진 가치관은 대학입시에서 철학과 물리학 같은 기초 학문보다 법학과 의학 같은 응용 학문이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현상을 낳았다. 하지만 개인적 입신과 출세의 최종 목적이 결국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것이라면, 현대의 실용성도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의 유명한 미술관 100곳을 소개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100〉은 문화와 예술이 실용성의 시대에도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단 미술관 건물 자체가 훌륭한 예술품인 경우가 많다. 건축학적으로도 유명한 빌바오와 뉴욕의 두 구겐하임 미술관, 내장이 겉에 나온 듯한 개성적인 퐁피두 센터, 네바 강변의 궁전에 자리 잡은 에르미타슈 미술관은 소장품을 보기도 전에 이미 예술의 세례에 흠뻑 젖게 한다. ‘미술관’이 주제인 만큼 미술품은 이 책에서 조연이지만, 수록된 300여 점의 작품들은 마치 독립적인 하나의 미술관에 소장된 미술품처럼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미술품들이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보다 대영박물관에 더 많고, 반 고흐 미술관에 정작 반 고흐의 주요 작품들이 없다는 점은 예술의 분야에도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우울한 사실을 말해준다.
전부 문화 침략이었던 것은 아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잔해가 이른바 ‘엘긴 마블스’라는 이름으로 영국에 옮겨진 것은 분명히 제국주의적 침탈이지만(외규장각 고문서의 경우처럼 현재 영국과 그리스 정부가 팽팽한 힘겨루기를 벌이는 중이다), 유럽 미술품의 상당수가 오늘날 미국의 미술관에 다수 소장된 데는 2차 대전 때 파시즘의 손아귀에서 예술을 구출하려 한 미국 예술계의 공로가 크다. 예를 들어 고고학자이자 마르세유 주재 미국 부영사였던 하이럼 빙엄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후원을 받아 1940년대에 마티스, 피카소, 샤갈, 칸딘스키 등 많은 화가들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많은 미술품들을 파괴의 위험에서 구해냈다. 국제적 차원에서 벌어진 문화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다. 이것을 개인적 차원에 적용하면, 응용 학문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자신의 재력으로 예술품을 구입해주거나 미술관을 후원하는 것도 훌륭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
저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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