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의 의미-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아동문학상 받은 재일동포 2세 작가의 자전적 성장 소설
민족문제 넘어 인간 공통문제 담아 일본 독자에 큰사랑
민족문제 넘어 인간 공통문제 담아 일본 독자에 큰사랑
<산다는 것의 의미-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고사명 지음·김욱 옮김/양철북·8700원
“내 이름은 김천삼입니다. 그러나 ‘삼아!’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걸쭉한 목소리가 창피하기만 합니다.”
1930년대 초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히코시마 섬의 조선인마을에서 아버지·형과 함께 사는 재일동포 2세 소년의 자전적 성장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마을은 에노우라 초에 있었지만 일본 사람들은 조선인들이 하모니카 나가야(칸을 막아서 여러 가구가 사는 공동주택) 밖에 풍로(사치린)를 내놓고 밥을 짓는 풍경을 빗대 사치린마치라 불렀다. 그가 세 살 때 동생을 낳은 뒤 돌아가신 어머니는 사진 한 장, 유품 하나 남긴 게 없어, 묘비에 새겨진 이름만 기억할 뿐이다. “나는 왜 ‘삼아’가 어울리는 조선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일본에서 태어난 걸까?” 스스로 이런 의문을 던진 그는 “내 삶엔 ‘한일병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고 답한다.
경남 마산 출생인 그의 부모는 일제의 토지 수탈과 전쟁에 내몰려 ‘누구나 쌀밥을 먹는다’는 일본으로 건너온 유민들로 평생 석탄을 나르는 인부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둑이 방 안에 똥만 한무더기 싸놓고 갔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던 소년은 소학교 입학식 날 비로소 ‘가난할 뿐만 아니라 엄마가 없는 아이’, 그리고 ‘조센징’이라는 현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더구나 일본 이름 ‘기노시타 다케오’로 불리게 되면서 소년의 의식은 뒤죽박죽 “커다란 늪”에 빠지게 된다. “조선인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 속에 열등감과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소년은 난폭한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끝내 조선인으로 남고 싶었던 아버지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고, 형제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 ‘조센징’의 괴로움을 털어놓지 못한다. 어느 날 “죽어버리겠다”며 반항하는 그의 모습에 놀란 아버지는 형제와 함께 조선 고향을 다녀온 뒤 더욱 절망해 자살 시도까지 한다. 고향에도 그들이 살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소년이 이런 현실에 그대로 갇혀버렸다면 이 소설은 아예 쓰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긴텐상’이라고 본명을 불러주는 일본인 사카이 선생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비로소 ‘조선인’으로서 빛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김천삼’이 본명인 작가 고사명(75)은 고등소학교를 중퇴한 뒤 다양한 직업을 거쳐 정치운동을 하다 첫 소설 〈어둠이 발길을 붙잡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 김사량, 김달수, 장혁주 등 1세대에 이어 이회성, 김학영, 김석범 등과 함께 2세대 재일 조선인 작가군에 속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민족 문제를 넘어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인간 공통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일본인 독자들에게도 큰 호응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출판사는 소개하고 있다. 30여년 전인 1974년 펴낸 ‘자화상이자 아버지에게 바치는 전기’인 이 작품 〈산다는 것의 의미〉로 일본 아동문학자협회상과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작품의 소재는 조선인 차별을 주로 다루었지만 실제로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소중한 인생’을 강조하고 있다.“나는 최선을 다해 이 길을 걸어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걸음은 일본과 조선을 이해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상냥함을 발견해 가는 걸음이었습니다. 나아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소중한 걸음이었습니다.
나는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아왔고, 그 노력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미 재일 3세대 작가들이 친숙해진 시점에 뒤늦게 그의 소설이 국내에 소개된 데에는 홋카이도 조선학교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우리 학교〉를 계기로 재일 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배경이 있다. 출판사 쪽은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면 권당 1천원씩 구매자 이름으로 도쿄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터를 마련하기 위한 지원모금 캠페인에 동참하게 된다고 밝혔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일제 당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 합숙하며 살았던 교토부 이지시 우토로의 함바집. 〈산다는 것의 의미〉의 주인공 김천삼이 태어나 13살까지 살았던 야마구치현 석탄공장 주변 조선인마을의 ‘하모니카 나가야’도 이와 비슷한 공동주택이었다. 원안은 저자 고사명씨.
소설의 주인공 ‘김천삼’이 본명인 작가 고사명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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