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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때가 좋았지, 했을땐 이미 늦었어

등록 2007-07-20 18:11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아메리칸 드림’ 짓밟힌 한 이민남성
뉴욕 지하철 언더그라운드 세계 통해
“미래를 위해 행복 유예 말라” 메시지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서진 지음/한겨레출판·9500원

제12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서진(32·본명 송종길)씨의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가 책으로 나왔다.

〈웰컴 투…〉는 뉴욕의 지하철이라는 생경한 공간을 배경으로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 남자의 몰락을 그린다. 1부에서 남자는 악몽인지 현실인지, 삶인지 죽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의식의 심연을 헤매다 지하철에서 깨어난다. 과거는 깡그리 잊었다. 지갑 속 신용카드에서 자신의 이름이 ‘김하진’임을 깨닫고, 아내와 아들로 추정되는 사진 속 사람들을 찾으러 나서지만 땅 위로 나갈 때마다 번번이 고꾸라져 정신을 잃는다.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찾아낸 아내는 남자가 이미 죽었다고 한다.

2부에서는 남자의 과거가 드러난다. 남자는 미국에서 닷컴 기업을 차려 성공한 선배의 제안으로 아내와 함께 이민길에 오른다. 그러나 닷컴 기업의 붕괴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부는 미국에 남아 아내는 세탁소에서, 그는 목수로 일하며 아등바등 살아보지만,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내의 부정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남자는 수리하던 오래된 벽돌집의 중심 기둥을 찍어내리고는 정체 불명의 구멍을 통해 언더그라운드의 세계로 들어간다.

3부는 언더그라운드 세계의 이야기다. 뉴욕 지하철이 100년 넘게 달리는 동안 가지치기되어 버려진 선로로 숨어든 사람들의 세계다. 언더그라운드는 소설의 주제가 집약된 공간이다. 삶에 결코 희망이란 없다는 걸 진작에 깨달은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산다. 언더그라운드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에이프릴의 말은 세상과의 연을 끊고 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여기서의 생활이 지상에서의 생활보다 나은 건 아닙니다. 어디에 가든 여기보다 더 나쁜 생활은 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죠. 그래서 더 안심이 돼요.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없을 거라고 여겨지면 어떤 고통도 쉽게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206쪽)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은 전직 의사인 폴이 나눠주는 약에 의지해 살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땅 위로 다시 올라온 남자는 드디어 보고 싶던 아들을 만난다. 그런데 희망을 되찾으려는 순간, 남자는 머리에 총을 맞는다.

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자 서진씨
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자 서진씨
삶에 희망 따윈 없다는 얘길 하려는 것일까? 그보다는 행복을 유예하는 대신 현재의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인생은 오르막길. 어차피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가까이 있어도 잡지 못하는 사소한 행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아버렸을 때에는 보통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때가 많다. 잠시라고 생각했을 때가 위험하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 저금하지 마라. 보험에 들지 마라. 현재를 살아라.”(150쪽) 죽음의 심연 속에서 남자는 배가 불룩한 아내에게 어깨를 내주며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겼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죽음 뒤의 심연과 땅 위의 삶, 땅 속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 뉴욕 지하철이 있다. 앞으로 달리거나 뒤로 달리거나 멈추거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객차의 움직임이 ‘빠르게 감기’(fast forward), ‘되감기’(rewind), ‘서서히 어두워지기’(fade-out), ‘서서히 밝아지기’(fade-in) 등의 영상 언어로 재구성되는 소설 속 시간의 움직임과 포개지면서, 지하철은 삶과 죽음, 땅 위와 땅 속을 매개한다.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소설은 탄탄하고 정교한 구성으로 속도감 있게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글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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