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몽양 여운형 전기 탈고 앞둔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지난 19일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정국의 중도좌파 지도자 몽양 여운형(1886~1947)이 암살된 지 꼭 60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기념사업회 주최 학술대회에서는 몽양이 추구했던 좌우합작 노선의 의미가 주요하게 다뤄졌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4대 강국 사이에서 한반도가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좌와 우가 합해 힘을 키워야 했다면서 몽양의 선택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북쪽에서는 좌우합작을 전략과 전술 측면으로 이해했다면서 당시의 좌우합작 세력은 정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지적했다.
하나의 틀로 묶기 힘든 몽양 사상의 ‘모호성’도 논란거리였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의 개척자로 몽양 전기 탈고를 앞두고 있는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몽양을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규정했다. 그는 “몽양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용어에 끼워 맞출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었지 그가 모호하거나 야릇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몽양이 중국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손을 잡거나 해방 이후 옛소련 군정 인사들과 자주 만났던 것은 △반제국주의 사상 △독립과 통일에 대한 집념의 발로였다는 해석이다. 이후 남로당 세력과 결별한 것은 그들이 제국주의 세력화한 스탈린 체제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21일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아파트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이 교수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1973)로 정치 및 국제문제 최고저작에 수여하는 미 정치학회 우드로 윌슨 파운데이션 상을 받았으며, <한국공산주의의 기원>(1959) 등의 저서를 냈다.
-전기는 언제쯤 나오나?
=1981년 몽양 차녀 여연구씨를 평양에서 만나, 전기 쓰기 위해 자료 모으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료가 자꾸 나오고 있는 것도 늦어진 이유다. 본격 연구는 지난 4년 동안 수행했다. 오는 9월 원고가 완성될 예정이다.
-몽양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등은 비교적 ‘단순한’ 인물이었다. 추구한 목표와 방법이 단순했다. 그러나 몽양의 활동은 매우 복잡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산주의자였다고 단정했다. 또 기회주의자였다는 비난도 받았다. 왜 그가 일직선을 걷지 않고 복잡한 길을 택했던가? 과연 몽양의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등의 질문은 학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하고 재미있는 과제이다.
-몽양은 왜 좌우합작에 집착했나?
=몽양은 1914년부터 16년 동안 중국에 있었다. 이때 중국의 반제국주의 사상과 국공합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국 혁명운동은 국제공산당 원조가 없었으면 이룩되지 않았다. 몽양은 좌·우가 같이 해야 중국에서처럼 혁명이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또 일제 탄압으로 좌나 우나 혁명역량이 강하지 않았다. -좌우합작의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좌우합작을 처음 밀고 나간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에게는 소련과의 타협이 가장 중요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소련이 배척했다. 그래서 중간세력인 여운형과 김규식을 밀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울대 정용욱 국사학과 교수는 미국은 우파통합을 위한 대표관리자로 중간파를 지지했으며 여운형을 지지한 것은 좌파를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고 밝혔다.) 1946년 중반 미국의 대한원조안인 ‘한국 정책(KOREA POLICY)’이 수립됐다. (이 계획대로) 미국이 방대한 경제원조를 했다면 경제가 좋아졌을 것이고 이 순간 몽양 지지세력이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조안은 국회로 넘어가기 전 폐기됐다. 1947년 중국 사태가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것도 (원조안 폐기에) 영향을 미쳤다.
-좌우합작은 곧 좌파의 권력장악을 의미했나?
=중국의 국공합작은 결과적으로 좌익에게 유리했다. 그런데 우익이 좀 더 정비되어 부패하지 않았더라면 국민당이 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국민당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은 전술적 문제다. 미국은 장개석이 전선을 넓히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국민당 (무력)이 5대 1로 강했다. 그러나 국민당 군대를 넓은 땅에 풀어놓으니까 싹 분산됐다.
-현실정치에서 몽양이 실패한 이유는?
=여운형은 타협형이다. 좌우합작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좌와 우는 자기 정해놓은 목표로 나가는 데 몽양은 좌와 우가 합해서 타협하는 길로 나갔다. 해방 뒤 한국사람이나 경제 모두 너무 빈곤했다. 중학 졸업자가 전 민족의 1%도 안 됐다. 경제나 교육수준이 타협적 상황을 만들지 못했다. 미·소 갈등이 날로 격화하는 국제적 조건도 나빴다. 전통도 타협보다는 극단적 싸움 지향이었다. 몽양은 너무 앞섰다. 한국의 민족성은 여운형과 같은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몽양은 트인 사람이고 국제화된 사람이고 남의 말에 귀 기울였다. 어떤 사람은 몽양이 너무 귀 기울였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몽양은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독립을 옹호한다는 원칙을 절대 고수했다.
-해방정국 지도자 인물평을 한다면?
=인간적 호감은 몽양 이상 없다. 박헌영은 도그마틱(교조적) 했고, 이승만도 그랬다. 김구는 개인적으로 만나면 인간성이 좋다고 하나 돌진형이었다. 김규식은 까다로운 선생이다. 몽양과 같은 호인은 없다.
글·사진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몽양은 1914년부터 16년 동안 중국에 있었다. 이때 중국의 반제국주의 사상과 국공합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국 혁명운동은 국제공산당 원조가 없었으면 이룩되지 않았다. 몽양은 좌·우가 같이 해야 중국에서처럼 혁명이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또 일제 탄압으로 좌나 우나 혁명역량이 강하지 않았다. -좌우합작의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좌우합작을 처음 밀고 나간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에게는 소련과의 타협이 가장 중요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소련이 배척했다. 그래서 중간세력인 여운형과 김규식을 밀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울대 정용욱 국사학과 교수는 미국은 우파통합을 위한 대표관리자로 중간파를 지지했으며 여운형을 지지한 것은 좌파를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고 밝혔다.) 1946년 중반 미국의 대한원조안인 ‘한국 정책(KOREA POLICY)’이 수립됐다. (이 계획대로) 미국이 방대한 경제원조를 했다면 경제가 좋아졌을 것이고 이 순간 몽양 지지세력이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조안은 국회로 넘어가기 전 폐기됐다. 1947년 중국 사태가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것도 (원조안 폐기에) 영향을 미쳤다.
여운형은 해방 뒤 독립국가 건설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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