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피난민 통제정책이 민간인 학살 불러
당시 서한 “피난민 이동땐 사격”
당시 서한 “피난민 이동땐 사격”
“미군 관련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중 적어도 일부는 ‘민간인 총격을 범해서라도’ 피난민을 통제하려던 피난민 정책 자체가 배태한 것으로 보인다.”
정구도 노근리평화연구소장과 김구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전 선임연구원은 1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리는 ‘제1회 노근리 국제평화학술대회’의 발표 논문 ‘한국 전쟁기의 미 제8군의 피난민 통제정책-피난민정책의 형성과 집행과정’에서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주도된 미군의 피난민 정책이 민간인 피해로 이어졌을” 개연성을 제기했다.
한국전 초기 미군은 피난민들이 △부대이동 및 보급물자 수송에 큰 지장을 주고 △북한군이 피난민 대열 속에 섞여 후방침투를 시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강력한 통제 정책 수립을 원했다. 민간인 이동을 금지하는 최초의 정책 문서는 1950년 7월23일 미 제1기병사단 본부에서 내려졌다. 그 내용은 사단 작전지역 안의 모든 한국인을 마을에서 내보내고 이후 발견되는 모든 한국인들은 적의 첩자로 간주한다는 내용이었다. 정 소장은 결코 농토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 많은 농민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이 정책으로 피난민이 훨씬 더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이 정책은 또 같은 사단이 진주했던 충북 영동 지역의 수많은 미군 관련 민간인 희생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같은 해 7월25일부터 29일 사이에 피난민들이 미 공군과 지상군 공격으로 살상당한 노근리 사건의 무대도 영동군 영동읍 하가리 및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로 일대였다.
같은 달 25일 대구 임시정부 청사 회의에서 미 8군과 한국정부가 합의한 정책은 “그 어떤 시간에도 피난민들은 전선을 통과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 소장은 이런 정책으로 “옆에서 폭탄이 떨어져도 농토를 떠나지 않는 농민들, 아우성치며 빨리 안전지대로 대피하려는 피난민들, 공포에 싸인 채 자신의 안전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추구하는 병사들은 어떤 결과를 빚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미국 역사가 사르 콘웨이 란츠 박사는 논문 ‘노근리와 미국의 명령’에서 “피난민 통제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민간인에 대한 사격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합의가 최전선의 군인과 고위급 장교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근거로 당시 주한 미 대사인 존 무초가 같은 달 26일 딘 러스크 당시 국무부 동북아 담당 차관보에게 보낸 서한을 거론했다. 무초는 여기서 피난민 문제가 한층 심각한 군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면서 25일 대구 대책회의의 결정사항을 이렇게 적었다. “만약 피난민이 미국 최전선의 북쪽으로부터 나타난다면 위협사격을 할 것이며, 그래도 계속 이동한다면 피난민에게 사격을 한다.”
란츠 박사는 이 회의가 미 대사관 쪽에 남한 피난민은 절대 사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뒤, “이 대책 회의의 어떠한 언급으로 인해 미 대사는 미군의 전선에 접근하는 양민은 사살될 수 있다는 묵계가 존재했음을 판단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1년 한·미 양국이 발표한 노근리 사건 공동조사 보고서는 당시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공격하도록 명령한 적이 없다고 단정했다.
란츠 박사는 “미 국방부가 노근리 사건을 조사하면서 어리석게도 이 서한을 참고하지 않았다”면서 “이 서한은 적어도 25일 대책회의가 난민 이동을 통제하는 최후수단으로 치명적 무력 사용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고 지적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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