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명다식
인터뷰 / ‘시명다식’ 최초 공동 번역한 김형태씨
“우리 전통 시가 연구도 한문 텍스트들을 모르고선 안 된다. 우리 시가문학에 풍부한 영감을 불어넣었던 옛 문헌들 중에서 〈시경(詩經)〉이 제일 재미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동식물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부를 위해 그에 관해 설명한 이런저런 책들을 추천받았는데 모두 중국 일본 책들이었다. 어찌 중국 일본 책만 있으랴 싶어 규장각 〈시경〉 관련 분야 문헌들을 몽땅, 그야말로 A에서 Z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시명다식〉(詩名多識)이라는 책을 찾아냈다. 그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시경〉에 등장하는 생물의 정체성을 규명한 유일무이한 저술이고, 특히 그 저자가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이자 가사 〈농가월령가〉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정학유라는 점에 이끌려 우리말로 옮겨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려 했다.”
연세대 국문학과에서 시가문학 연구로 2005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김형태(38)씨.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심사 때 부심을 맡아준 같은 과의 허경진 교수와 함께 〈시명다식〉(한길사)을 번역했다. 학계 일부에선 〈시명다식〉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물 일반에 대해 설명한 ‘물명고’류는 민속학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문헌들인데, 규장각에만 10여본이 있다. 하지만 〈시경〉 동식물들에 관한 우리나라 고증서로는 〈시명다식〉이 유일하고 자세하다. 일종의 〈시경〉 참고서라고도 할 수 있다.”
〈논어〉에 공자가 역시 유교 경전의 하나인 〈시경〉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한 내용이 나오는데, ‘양화’편에서 제자들에게 〈시경〉을 읽으면 “조수초목의 이름에 대해서도 많이 알 수 있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했다고 한다. 〈시명다식〉이란 책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조수초목이라면 새와 짐승, 풀과 나무라는 얘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가운데 하나로 옛사람의 생활상과 희로애락의 자취를 담은 〈시경〉이 조수초목을 소재로 노래했을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이들 조수초목을 모르고선 〈시경〉을 읽었다 한들 제대로 알았을 리 없고, 한글로도 그냥 옮겨 놓기만 해서는 그 뜻을 바로 알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 가사나 한시 갈래 등에 〈시경〉이 인용된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시경〉이 인용된 우리 문학작품의 경우 올바른 독법과 해석을 위해 〈시경〉 문구나 물명(사물 이름)에 대한 의미 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약용 아들 정학유가 쓴 국내 유일 연구서
꼼꼼한 원문 고증과 주석에 그림도 덧붙여
“고전 사장되고 한문학 대가 사라져 걱정”
성리학(주자학)을 집대성한 남송 주희의 〈시전〉은 〈시경〉에 나오는 동식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이런 식이다. ‘복속(떡갈나무)은 작은 나무다. 백(측백나무)은 나무이름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어떻게 제대로 된 의미 파악이 가능하랴. 그래서 많은 다른 주석서들이 나왔는데, 〈시명다식〉도 설명하고자 하는 사물이 〈시경〉의 어느 장, 어느 편명에 해당하는지를 쓰고 많은 관련 문헌 내용들을 인용한다. “인용된 문헌과 순서는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주희의 〈시전〉, 그 다음에 육기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 그리고 그 다음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 〈이아〉, 진대 곽박의 〈이아주〉 식으로 이어진다.” 정학유는 그냥 그것들을 인용만 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의견도 덧붙이는 등 실사구시 정신에 충실했다. 〈시명다식〉은 〈시경〉에 나오는 동식물들을 풀(識草), 곡식(識穀), 나무(識木), 푸성귀(識菜), 날짐승(識鳥), 길짐승(識獸), 벌레(識蟲), 물고기(識魚) 등 여??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는 식물 항목을 대부분 ‘식초’나 ‘식목’으로 단순 이분한 중국 일본의 훈고서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발휘한 것”이라고 역자들은 지적한다.
규장각본과 일본 도쿄대의 오구라(小倉)문고본을 저본으로 김씨가 1차 번역을 하고 허 교수가 2차로 다듬은 번역본 〈시명다식〉은 허 교수와 연민 이가원이 1991년에 함께 풀어낸 〈시경 신역〉의 시들에서 관련 부분을 각 항목 말미에 덧붙여 놓아 해당 이름이 어디서 어떤 맥락 속에 등장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원저에는 없는 해당 항목 그림들을 중국·일본 책들에서 찾아내 함께 배치해 이해도를 크게 높였다. 꼼꼼한 원문 고증, 주석도 돋보인다.
〈시명다식〉은 규장각본, 오구라문고본 외에 미국 버클리대의 아사미문고본이 있는데, 김형태씨는 지금까지 연구로 규장각본이 가장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선본(善本)이며, 오구라문고본은 일본인이 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밝혀냈다. “규장각본이나 아사미문고본도 모두 필사본이다. 정학유 친필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아사미는 일제 때 조선에 와 있던 변호사인데, 수임료 대신 받아 모은 다량의 조선 귀중본들을 버클리대에 기증했다.” 다산의 장남 정학연의 시집 〈삼창관집〉도 일본 궁내청에서 발견됐는데, 이처럼 우리 옛 전적들은 파란의 역사를 반영하듯 나라 바깥에 다량 유출돼 있으나 그 윤곽조차 제대로 파악돼 있지 않고, 나라는 전문 연구자들 육성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학문의 식민화가 거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김씨는 “이대로 간다면 고전들이 계속 사장되고 한문학 대가들도 점차 사라져” 전통학문 연구가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김씨는 정학유가 가장 많이 인용한 〈본초강목〉에는 “항목들의 유래 등 서사가 있다”며 완역에 도전해볼 작정이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김형태씨. 사진 박종식 기자
꼼꼼한 원문 고증과 주석에 그림도 덧붙여
“고전 사장되고 한문학 대가 사라져 걱정”
성리학(주자학)을 집대성한 남송 주희의 〈시전〉은 〈시경〉에 나오는 동식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이런 식이다. ‘복속(떡갈나무)은 작은 나무다. 백(측백나무)은 나무이름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어떻게 제대로 된 의미 파악이 가능하랴. 그래서 많은 다른 주석서들이 나왔는데, 〈시명다식〉도 설명하고자 하는 사물이 〈시경〉의 어느 장, 어느 편명에 해당하는지를 쓰고 많은 관련 문헌 내용들을 인용한다. “인용된 문헌과 순서는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주희의 〈시전〉, 그 다음에 육기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 그리고 그 다음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 〈이아〉, 진대 곽박의 〈이아주〉 식으로 이어진다.” 정학유는 그냥 그것들을 인용만 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의견도 덧붙이는 등 실사구시 정신에 충실했다. 〈시명다식〉은 〈시경〉에 나오는 동식물들을 풀(識草), 곡식(識穀), 나무(識木), 푸성귀(識菜), 날짐승(識鳥), 길짐승(識獸), 벌레(識蟲), 물고기(識魚) 등 여??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는 식물 항목을 대부분 ‘식초’나 ‘식목’으로 단순 이분한 중국 일본의 훈고서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발휘한 것”이라고 역자들은 지적한다.
김형태씨. 사진 박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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