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바이 E. H.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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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 1962년에 펴낸 <역사란 무엇인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영국의 역사학자다. 그의 주저는 1966년 우리말로 번역된 뒤 국내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80년대에는 대학가의 필독서 노릇을 했다. 역사의 진보에 확고한 신념을 지녔던 카는 이 책에서 실증사학, 곧 역사란 객관적 자료를 실증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종래의 역사학적 상식을 거부하고 역사를 대하는 연구자의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가 여기서 탄생했다. 역사학은 역사가가 몸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며, 역사 해석은 불변의 객관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의 그의 주장이었다. 역사가의 태도와 관점을 자료의 실증성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해석’이라는 문제가 돌출됐고, 카의 역사관은 실증사학에 물들어 있던 국내 역사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기존의 정치사·왕조사 중심의 역사 연구에서 벗어나 민중사관·계급사관에 입각한 사회사·경제사가 전면에 나섰다.
<굿바이 E. H. 카>(원제:What is history now?)는 카의 사망 20주기를 기념해 2001년 영국의 역사연구소가 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이 심포지엄의 취지는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내놓은 주장을 재평가하고 그동안 전개된 역사학의 발전과 변화를 살피고 설명하자는 것이었다. 영·미에서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사학의 등장과 80년대 말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진보를 낙관하는 카의 역사관은 난관에 봉착했고, 역사학계 내부에서는 카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다양한 역사학 하위 분야가 가지를 쳐 나왔다. 이 책에서는 사회사·정치사 외에도 종교사·문화사·여성사·젠더사·지성사·제국사 등 지난 20여 년 사이에 본격화하거나 연구 방향이 크게 바뀐 분야의 전문학자들이 나와 카 이후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지은이들은 오늘날 역사학은 카 시대처럼 진보를 속 편하게 낙관하지는 못하지만, ‘대화’를 강조한 카의 태도는 여전히 이 시대의 역사학에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서의 제목에 ‘굿바이’를 붙인 것은 너무 많이 나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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