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일 남장 체험>
호기심에 남장하고 경험한 남성세계
때론 우정에 매료되고 때론 연민
가해자이자 희생자로서의 모습 확인
때론 우정에 매료되고 때론 연민
가해자이자 희생자로서의 모습 확인
<548일 남장 체험> 노라 빈센트 지음·공경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1만1000원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은찬이는 ‘남장 여자’로 살면서 마냥 가슴 설레기만 했을까? 그림동화 속 예쁘게 채색된 소녀(또는 소년)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의 거친 입담에 끼어들거나 질척한 밤 문화에 동참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실제 548일 동안 ‘남장 여자’로 살았던 노라 빈센트의 이야기가 바로 그 증거다.
뉴욕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노라는 어느 날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시작은 순진한 마음이었다. 단지 남성의 경험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얻어 그럴듯한 가짜 수염을 붙이고, 6개월간 보디빌딩으로 근육을 키웠다. 상고머리로 깎고 사각 안경을 쓰고 발성법 선생에게서 남자처럼 말하는 법도 배웠다. 붕대로 친친 가슴을 동여매고 심지어 바지 안에 인공 성기까지 달았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그는 서른다섯 살 ‘네드’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네드’는 레이스 옷 대신 아버지의 면도크림을 탐냈던 그의 어린 시절 별명이다. 레즈비언으로 살면서 종종 남자로 오해받던 터라 ‘남자 노릇’은 꽤 쉬워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첫 경험은 매주 한번 남자들의 볼링팀에 참가하는 것. 남성적인 위계, 힘, 경쟁과 관계있는 경기에서 남자들은 애버리지 102점 언저리를 맴도는, 어리바리한 ‘네드’를 가르치려 들었다. 남자들의 성적 욕망 밑바닥까지 보기 위해 스트립 클럽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기도 했다. 벌거벗은 여자들과 잡담을 하고, 칸막이 방에서 여자들과 신체접촉을 하고……. 여자 몸을 ‘도구’로 대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모욕적이었다. 외모나 나이, 업적과 상관없이 남자들의 머릿속은 한 가지로만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성 노동자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고 집을 고치는 요령 따위를 나누면서 네드는 그들의 우정에 매료됐고, 클럽에서 만난 비열한 남자 손님들의 고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남자’ 네드 눈에 비친 그들은 달리 갈 곳이 없는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다. ‘남장 여자’ 네드는 길을 잃은 걸까?
남성의 동물적인 욕망 반대편 끝에 위치한 금욕의 공간, 수도원에서 만난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군대와 다르지 않았다. 감정 표출은 금기시되고, 고통을 하소연하거나 위로나 연민을 바라면 안 됐다. 소년은 울지 못하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 “더 단단해져라, 이 사내자식아!” 윽박지르는 압박감은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네드는 점점 당혹스러워졌다. 남자들의 비밀을 벗겨내려 할수록 예상치 못했던 연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든 남성은 가부장제에 젖어 있다’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치밀하고 의식적인 ‘네드’로서의 생활과 타고난 ‘여성성’의 잠재의식은 매순간 충돌했다.
네드, 아니 노라는 한 남성운동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1년 반 만에 ‘네드 노릇’을 그만뒀다. 그곳의 남자들은 “아내를 조각조각 난도질하는 상상을 한다”는 등 공공연하게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지만, 이들의 어깨 위에 놓인 ‘남성성의 신화’는 힘겨워 보였다. 노라가 ‘남자’라는 가면을 썼듯이, 사실 남자들은 ‘강한 남성’이라는 납덩이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불쌍한 존재였던 셈이다. 노라는 결국 사기꾼이라는 죄책감과 들킬 거라는 초조감, 모순된 성 정체성에 대한 극도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모든 남자들은 강력한 갑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 갑옷 안에는 벌거벗고 불안정하고 아무도 보지 않기를 바라는 가련한 몸이 들어 있다.” 노라는 남자들을 이해하게 됐지만 그들을 위해 변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가부장제의 갑옷을 벗어야 하는 건 남성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남장을 하고 ‘남자 체험’을 했던 노라 빈센트의 여자 모습.(왼쪽) 여자 ‘노라’가 서른다섯살 남자로 변신한 ‘네드’의 모습.(오른쪽)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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