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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플라톤 파괴자’가 해석해낸 반시대적 철학

등록 2007-09-28 20:09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 들뢰즈 지금·박정태 엮어 옮김/이학사·3만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 들뢰즈 지금·박정태 엮어 옮김/이학사·3만원
사유의 씨앗 된 주요 소논문 22편 모아
엮어 옮긴 이 꼼꼼한 주석·해설 덧붙여
까다로운 들뢰즈 이해로 친절한 안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질 들뢰즈 지금·박정태 엮어 옮김/이학사·3만원

질 들뢰즈(1925~1995)는 20세기 후반 이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쉬운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까다로운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주요 저서가 모조리 우리말로 번역됐는데도 그의 철학이 오독과 오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 까다로움 때문이다. 그의 사유 범위는 너무 넓고 그의 개념 어휘는 너무 낯설다.

들뢰즈 전공자인 박정태(프랑스 파리8대학 박사)씨가 엮고 옮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는 들뢰즈라는 철학적 미궁을 비교적 안전하게 답사하게 해줄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은 책이다.

질 들뢰즈. 들뢰즈는 플라톤 철학의 오류를 지적했다.
질 들뢰즈. 들뢰즈는 플라톤 철학의 오류를 지적했다.
이 책-실은 여러 가닥의 짧은 실을 묶어 길게 늘인 실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 쓴 짧은 논문들을 계통을 따져 가지런히 엮은 것이 이 책이다.

들뢰즈는 단행본 저작 외에, 1950년대 초반부터 타계할 때까지 40여 년에 걸쳐 40여 편의 소논문을 썼는데, 그 가운데 엮은이가 보기에 특별히 중요한 22편이 이 책에 모였다.


이 소논문들이 중요한 것은 들뢰즈 사유의 씨앗이 싹트고 성장하는 과정이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칡덩굴처럼 뻗어나간 들뢰즈 사유의 출발점들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는 글들인 것이다.

특히 이 편역판은 옮긴이 박정태씨의 꼼꼼한 주석과 해설이 돋보인다. 들뢰즈에게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의 어두운 지점마다 옮긴이의 주석이 가로등처럼 서 있다. 편위(클리나멘)·환영(시뮐라크르)·내재성·차이·반복 같은 용어들을 설명한 주석들은 그 자체로 작은 개념어 사전을 이룬다.

이 책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인 것은 들뢰즈가 선별하고 들뢰즈가 해석한 철학자들이 모여 특이한 철학 역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주저 가운데 하나인 〈차이와 반복〉에서 “철학사는 회화의 한 장르인 콜라주의 구실과 아주 유사한 구실을 해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콜라주 기법으로 이루어진 철학사라 할 만하다.

 플라톤
플라톤
여기서 콜라주의 단편으로 등장하는 것이 플라톤·루크레티우스·스피노자·흄·루소·칸트·니체·베르그송·푸코, 그리고 들뢰즈 자신이다. 해석이란 일종의 반복행위다.

들뢰즈는 이 반복에 ‘최대한의 변경’을 가함으로써, 바꿔 말해, 할 수 있는 한 창조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철학자들의 익숙한 모습을 바꿔놓는다. 〈차이와 반복〉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적으로 수염을 기른 헤겔을, 철학적으로 면도를 한 마르크스를” 그의 해석은 보여주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때의 철학사가 비주류의 철학사를 이룬다는 점이다. 서양 철학의 주류를 만든 철학자는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주류 바깥에 머물러 있던 철학자는 적극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시대에 대항하는 ‘반시대적’ 철학사로 조합해내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적 스승이라 할 스피노자·니체·베르그송의 사유를 이 비주류 철학사 서술의 핵심 거점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이 독특한 철학사를 통해 들뢰즈 사상의 토대와 뼈대가 확연히 드러난다.

옮긴이의 설명을 따르면, 들뢰즈의 사유는 “엄격하게 방향이 잡힌 해석상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초기의 철학사 공부에서 이룬 성취가 후기의 자기 사상 서술에 거의 바뀜 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모음에서 들뢰즈가 최대의 극복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는 ‘플라톤 파괴자’를 자처한다. 플라톤을 파괴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파괴 중에서 가장 결백한 파괴”라고 단언한다. 플라톤이야말로 서양 철학의 잘못된 길을 닦은 최초의 철학자이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휘두른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지목하는 플라톤 철학의 오류 가운데 핵심이 ‘초월성’이다. 플라톤은 초월주의 철학을 정초한 사람이다. 플라톤이 초월 철학을 세운 데는 아테네의 ‘혼란스런’ 민주주의가 배경으로 있다.

아테네는 동방의 전제군주 국가들과 달리, 모든 시민이 평등한 사회였다. 말하자면 ‘친구들의 공동체’였다. 문제는 그 평등성·동등성 때문에 어떤 의견도 지배적 기준 노릇을 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소피스트(궤변론자)들이 활보한 것이 그 혼란스러움의 단적인 사례다.

플라톤은 이 혼란을 극복하려면 의견들을 선별할 초월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시한 것이 ‘이데아’였다. ‘이데아’는 머지않아 서양 사유의 독재적 준거로 선다.

들뢰즈가 공격하는 것이 바로 이 초월적 이념이다. “이처럼 초월성을 철학에 물고 들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초월성에 그럴듯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플라톤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독이 든 선물인 것이다.”

들뢰즈는 이 초월성의 목을 쳐버린다. 그러면 남는 것은 동등성·평등성의 세계다.

그것을 들뢰즈는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도 초월적 지위를 점하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지배적인 권력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내재성의 평면이다. 이 평면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다. 요컨대, ‘영원회귀’의 장이다.

영원회귀는 ‘차이와 반복’을 원리로 삼는다. 끝없이 반복하되 언제나 차이 나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다. 이 반복은 ‘시련’이자 ‘시험’이기도 하다.

“영원회귀는 시련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든 어정쩡한 것들을 제거해버린다.” 시련과 시험을 통해 살아남는 것만이 반복하며, 그 반복을 통해 차이를, 새로움을 생산한다. 들뢰즈는 이 차이와 반복의 세계로서 ‘내재성의 평면’을 개인이든 집단이든 각자가 자기 안에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기 안에 내재성의 장을 세운 자들은 현재의 질서를 고정시키려는 지배적 힘들에 대항한다. 지배적 힘에 대항해 그것을 무너뜨리되 자기 자신을 지배자로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반시대적 철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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