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래 감독의 최근작 〈디워〉는 혹평하는 전문비평가와 이에 맞서는 누리꾼들의 옹호라는 새로운 비평구도를 만들어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디워〉 팬카페는 심 감독을 지지하는 감상기들로 넘쳐났다.
김예란 교수, ‘디워’ 비평구도 분석
인터넷 통해 등장한 ‘말하는 대중’과 ‘쓰는 개인’
대중문화 비평계 기성 권위에 도전-재평가 시도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는 작품뿐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비평 구도와 그 전개 과정의 새로움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지식과 경험을 앞세운 전문 비평가들의 목소리가 대중들의 열렬한 함성에 묻혀 버리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대중이 비평가에게 맞서는 이런 낯선 광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예란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계간지 <사회비평> 겨울호에 실은 에세이 ‘신성한, 지극히 신성한’에서 <디워> 현상을 ‘디지털 환경에서의 말하는 공중의 탄생’이라는 관점을 통해 바라봤다.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정은 말과 유희, 그리고 사랑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이었다는 김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가 말하기-놀기-사랑하기를 경험하고 담론화하는 개인의 등장을 대면하고 있다고 봤다. 예컨대, 인터넷을 통해 대중의 말하기가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을 통해 매개되는 영화·텔레비전·음반의 향유는 “위계적 문화질서로부터 해방된 다중의 다감각적 문화 소비”의 가능태라는 것이다. 전지구인이 공존하는 가상세계인 ‘세컨드라이프’는 현실세계에서 결핍되어 있거나 잉여로 존재하는 사랑의 욕구들이 또다른 세계를 형성하는 등 디지털 생태계에서 친밀성의 구조와 사랑의 관계 역시 변동을 겪고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김 교수는 블로그와 미니홈피로 대변되는 쓰는 ‘개인’의 등장에 대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는 성찰적 주체의 형성 △개인 내러티브(서사) 구성을 통해 삶을 미적 대상으로 조형하고 △개인 내러티브를 통한 사회적 기억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봤다. 문화이론연구자인 스튜어트 홀이 70년대 말 미디어 수용자에게서 스스로 비판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잠재적인 능동성’ 개념을 발견했다면, 김 교수는 최근 온라인 글쓰기 열풍에 대해 이런 능동성 개념이 가시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다수의 쓰는 개인은 수다스러운 집단으로 드러나지 않는가? 심지어 ‘쓰레기’로 폄하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근대 ‘읽는 공중’의 존재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당시 묵독이 엘리트의 책읽기 방식이었다면, 일반 대중은 여럿이 모여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책읽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대중의 읽기 문화가 반드시 고상하거나 지적인 작업만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러한 “저속한 책읽기 속에서 대중의 잠재적 기운이 발동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디지털 환경이 유도한 ‘쓰는 개인’의 사회적 출현에 대해 20세기 대중문화의 특성인 다성성(多聲性) 즉 노이즈들의 부조화스러운 혼재를 통해 설명했다. 고전 미학은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쏘 왓(so what)!?)’라고 물었다면, 대중 미학은 ‘안 되란 법이 어딨어!(와이 낫(why not)!?)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세기 ‘와이 낫!?’의 대중문화적 ‘개김’이 취향의 위계 질서에 도전하며 하나의 문화적 취향으로 정당화되는 성과를 거두었다면서 <디워> 현상은 이제 말하는 대중이 비평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들은 미적 스타일에 대한 개인적 선호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취향에 대한 사회적 평가, 제도에 대한 도덕적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두 방향의 불안감을 토로했다. 그는 우선 “쓰는 개인의 글과 말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감수성과 의지를 거의 갖추지 못한 기성 권위의 무감각성과 무능력성”을 지적했다. 이런 소통적 무능력성은 기성 권위의 미학적 취약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보수적 집단성을 지닐 위험성과 취향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대중의 말이 자칫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의 ‘아무거나(왓에버(whatever))’의 태도로 변질될 수 있다고 봤다. ‘소 왓!?’이 절대 진리에 대한 강박과 개인성의 억압을 낳았고 ‘와이 낫!?’의 반항은 공격적 자유주의와 그로부터 피로해진, 외로운 개인을 낳았다면 ‘왓에버’의 순응주의는 지각과 운동에너지는 끓어 넘치지만 성찰과 숙의의 미덕으로부터 스스로를 방기한 오직 천진난만한 사이보그(기계인간)만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대중문화 비평계 기성 권위에 도전-재평가 시도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는 작품뿐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비평 구도와 그 전개 과정의 새로움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지식과 경험을 앞세운 전문 비평가들의 목소리가 대중들의 열렬한 함성에 묻혀 버리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대중이 비평가에게 맞서는 이런 낯선 광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예란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계간지 <사회비평> 겨울호에 실은 에세이 ‘신성한, 지극히 신성한’에서 <디워> 현상을 ‘디지털 환경에서의 말하는 공중의 탄생’이라는 관점을 통해 바라봤다.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정은 말과 유희, 그리고 사랑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이었다는 김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가 말하기-놀기-사랑하기를 경험하고 담론화하는 개인의 등장을 대면하고 있다고 봤다. 예컨대, 인터넷을 통해 대중의 말하기가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을 통해 매개되는 영화·텔레비전·음반의 향유는 “위계적 문화질서로부터 해방된 다중의 다감각적 문화 소비”의 가능태라는 것이다. 전지구인이 공존하는 가상세계인 ‘세컨드라이프’는 현실세계에서 결핍되어 있거나 잉여로 존재하는 사랑의 욕구들이 또다른 세계를 형성하는 등 디지털 생태계에서 친밀성의 구조와 사랑의 관계 역시 변동을 겪고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김 교수는 블로그와 미니홈피로 대변되는 쓰는 ‘개인’의 등장에 대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는 성찰적 주체의 형성 △개인 내러티브(서사) 구성을 통해 삶을 미적 대상으로 조형하고 △개인 내러티브를 통한 사회적 기억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봤다. 문화이론연구자인 스튜어트 홀이 70년대 말 미디어 수용자에게서 스스로 비판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잠재적인 능동성’ 개념을 발견했다면, 김 교수는 최근 온라인 글쓰기 열풍에 대해 이런 능동성 개념이 가시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다수의 쓰는 개인은 수다스러운 집단으로 드러나지 않는가? 심지어 ‘쓰레기’로 폄하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근대 ‘읽는 공중’의 존재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당시 묵독이 엘리트의 책읽기 방식이었다면, 일반 대중은 여럿이 모여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책읽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대중의 읽기 문화가 반드시 고상하거나 지적인 작업만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러한 “저속한 책읽기 속에서 대중의 잠재적 기운이 발동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디지털 환경이 유도한 ‘쓰는 개인’의 사회적 출현에 대해 20세기 대중문화의 특성인 다성성(多聲性) 즉 노이즈들의 부조화스러운 혼재를 통해 설명했다. 고전 미학은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쏘 왓(so what)!?)’라고 물었다면, 대중 미학은 ‘안 되란 법이 어딨어!(와이 낫(why not)!?)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세기 ‘와이 낫!?’의 대중문화적 ‘개김’이 취향의 위계 질서에 도전하며 하나의 문화적 취향으로 정당화되는 성과를 거두었다면서 <디워> 현상은 이제 말하는 대중이 비평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들은 미적 스타일에 대한 개인적 선호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취향에 대한 사회적 평가, 제도에 대한 도덕적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두 방향의 불안감을 토로했다. 그는 우선 “쓰는 개인의 글과 말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감수성과 의지를 거의 갖추지 못한 기성 권위의 무감각성과 무능력성”을 지적했다. 이런 소통적 무능력성은 기성 권위의 미학적 취약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보수적 집단성을 지닐 위험성과 취향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대중의 말이 자칫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의 ‘아무거나(왓에버(whatever))’의 태도로 변질될 수 있다고 봤다. ‘소 왓!?’이 절대 진리에 대한 강박과 개인성의 억압을 낳았고 ‘와이 낫!?’의 반항은 공격적 자유주의와 그로부터 피로해진, 외로운 개인을 낳았다면 ‘왓에버’의 순응주의는 지각과 운동에너지는 끓어 넘치지만 성찰과 숙의의 미덕으로부터 스스로를 방기한 오직 천진난만한 사이보그(기계인간)만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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