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철학〉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걷기의 철학〉
크리스토프 라무르 지음·고아침 옮김/개마고원·9000원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고른 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나 자신이 한 해를 어떻게 보낼지를 성찰하고 전망하기 위해 읽는 책이니까 말이다. 세상은 온통 ‘실용’을 표나게 내세운다. 다시, 성장만이 유일한 가치인 양 떠벌린다. 이런 시대에 어리석게도 〈걷기의 철학〉을 읽어나갔다. 본디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걷는다는 것은 지극한 일이다. 발바닥이 땅을 디디는 것은 마치 연인을 애무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미약한지라 오랫동안 걸어야 비로소 둘 사이의 일치를 이룬다. 세상에 이토록 고요한 오르가슴이 없으리라. 달리기는, 그런 점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걷기의 철학〉은 걷기의 의미와 가치를 잘 풀어나간다. 무엇보다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비록 문고본 정도의 분량이긴 해도 걷기만을 주제로 이만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은 보통 내공이 아니다. 32개의 열쇳말로 조근조근 말해 나가는 게, 그 어떤 목청 높은 글보다 설득력이 높다. 서문부터 입맛을 돋운다. “걷기와 생각하기는 밀접하게 연관된 두 행위이다. 둘 다 몸과 정신을 동시에 이용하고 정상을 목표로 삼으며, 노력을 필요로 하고, 마지막으로는 늘 이러한 고생을 100배 이상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자주 걸어본 이들이 익히 깨달았을 만한 말이다. 운동을 위해 빨리 걷는 것은 진정한 걷기가 아니다. 당장에 도움이 될 그 무엇을 목표로 한다면 걷기의 진정성은 그만큼 빨리 휘발한다. 설혹, 도움이 되지 않아도 스스로 좋아서 늘 하는 것이 걷기다. 그러기에 걷기는 느림과 동의어일 수밖에 없는 법. 지은이는 말한다. “오직 느림만이 우리를 세상의 헤아릴 수 없는 매력 속으로, 무한히 풍부하고 재미있는 자연의 틈새로 이끈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의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이 느린 움직임※느림은 움직임을 함축하므로※을 통해 드러난다.” 걷기는 때로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저 메카로 떠나는 무리들을 떠올려보라. 그 누구도 목적지에 빨리 이르기 위해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 삼보일배하는 수도자들을 기억해보라. 발로 걷고 몸을 던지며 참된 것에 다다르기를 갈망한다. 그렇기에 걷기는 순례와 같은 뜻이니, “걸음은 우리를 이 물질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세상에 붙들어 매는 매듭을 풀고, 몸을 정화한다. 다시 말해 정신이 다시금 몸에 자리잡게끔 해준다.”
걷기가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말하면 의아해할 사람이 많을 듯싶다. 그러나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여럿이, 함께 하는 걸음에서 비롯했다. 뜨거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더 큰 자유와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자기 권리와 사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특정한 정치적 결정과 그것을 채택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의사, 분노, 적대감을 표현하기 위해 걸을 수 있다.” 천박한 실용에 맞서는 힘은 성찰하고 저항하는 느림에서 솟아날 터이다. 어려운 시절, 걷고 또 걸어야 할 터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크리스토프 라무르 지음·고아침 옮김/개마고원·9000원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고른 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나 자신이 한 해를 어떻게 보낼지를 성찰하고 전망하기 위해 읽는 책이니까 말이다. 세상은 온통 ‘실용’을 표나게 내세운다. 다시, 성장만이 유일한 가치인 양 떠벌린다. 이런 시대에 어리석게도 〈걷기의 철학〉을 읽어나갔다. 본디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걷는다는 것은 지극한 일이다. 발바닥이 땅을 디디는 것은 마치 연인을 애무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미약한지라 오랫동안 걸어야 비로소 둘 사이의 일치를 이룬다. 세상에 이토록 고요한 오르가슴이 없으리라. 달리기는, 그런 점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걷기의 철학〉은 걷기의 의미와 가치를 잘 풀어나간다. 무엇보다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비록 문고본 정도의 분량이긴 해도 걷기만을 주제로 이만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은 보통 내공이 아니다. 32개의 열쇳말로 조근조근 말해 나가는 게, 그 어떤 목청 높은 글보다 설득력이 높다. 서문부터 입맛을 돋운다. “걷기와 생각하기는 밀접하게 연관된 두 행위이다. 둘 다 몸과 정신을 동시에 이용하고 정상을 목표로 삼으며, 노력을 필요로 하고, 마지막으로는 늘 이러한 고생을 100배 이상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자주 걸어본 이들이 익히 깨달았을 만한 말이다. 운동을 위해 빨리 걷는 것은 진정한 걷기가 아니다. 당장에 도움이 될 그 무엇을 목표로 한다면 걷기의 진정성은 그만큼 빨리 휘발한다. 설혹, 도움이 되지 않아도 스스로 좋아서 늘 하는 것이 걷기다. 그러기에 걷기는 느림과 동의어일 수밖에 없는 법. 지은이는 말한다. “오직 느림만이 우리를 세상의 헤아릴 수 없는 매력 속으로, 무한히 풍부하고 재미있는 자연의 틈새로 이끈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의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이 느린 움직임※느림은 움직임을 함축하므로※을 통해 드러난다.” 걷기는 때로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저 메카로 떠나는 무리들을 떠올려보라. 그 누구도 목적지에 빨리 이르기 위해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는다. 삼보일배하는 수도자들을 기억해보라. 발로 걷고 몸을 던지며 참된 것에 다다르기를 갈망한다. 그렇기에 걷기는 순례와 같은 뜻이니, “걸음은 우리를 이 물질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세상에 붙들어 매는 매듭을 풀고, 몸을 정화한다. 다시 말해 정신이 다시금 몸에 자리잡게끔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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